조선인은 조선의 시를 쓰라, 예술인들로 본 조선의 역사
조선인은 조선의 시를 쓰라는 제목이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찝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조선시대 시인은 물론이고, 예술인들에 대한 옴니버스 형식의 인물평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농공상의 조선에서 예술인은 양반들의 글쓰기 중심으로 기록이 남아 전할 것이기에 결국 이 책에서 詩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크다.
역사학자인 이이화 선생님께서 개인의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조선의 역사적인 문학사와 여성 문장가, 민중의 삶을 노래한풍류 시인, 일제 시대의 저항시인과 친일파 시인, 우리 전통의 음악인들, 마이너로 활동했던 화가들, 우리영화의 뿌리 등을 찾아 정리한 책이다.
첫번째 소개되는 인물, 변계량은 어려서 이색·정몽주 문하에서 수학 했으나 정도전·권근에게서 수학한다. 어려서 온건개혁파(사림파의 뿌리)에게서 배우고, 성장하여 역성혁명파(훈구세력의 뿌리)들을 스승으로 모신 특이한 이력이 주목을 받을만 하다. 그러한 까닭인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의 2대 명신으로 평가받는 변계량은 황희와 달리 주관없는 혼란의 가치관을 가진 청치가로 평가받고 있다.
두번째 인물. 서거정은 호가 사가정이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정자라는 의미의 낙천적인 그의 기상을 담은 노년의 호이다. 지금 서울 용마산 서쪽자락에는 그가 활동했던 역사적인 근거로 '사가정 공원'이라는 꽤 잘 꾸며진 공원이 있으며, 그곳에 '사가정'이란 정자가 만들어져서 그의 자유롭고 호방했던 삶을 전해주고 있다. 심지어 지하철역이름도 사가정이다. (사실 우리 아파트가 사가정 공원 바로 옆에 있다. ^^)
세번째 인물로 이 책에서 가장 비중있게 소개된 매월당 김시습은 사가정 서거정과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방랑과 저항의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다섯살때 이미 세상을 놀라게 한 천재로 세종의 눈에 들었던 그가 말년을 보낸 설악산의 암자가 오늘날 오세암으로 불리는 것(오세암의 전설은 또 다른 것도 있다.)은 그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임제는 전라도 나주 출신의 인물로 황진이의 무덤에 술잔을 올린 사실이 밝혀져 파직이 되기도 했던 호방한 인물이다. 임제는 자신의 기개를 뽐내는 시도 쓰고, 조선의 썩은 유학자들을 비판하며 한 세상 살다 갔는데, 그가 생전에 어린 기생에게 남겨준 시(92쪽) 한 수가 제법 매력적이다.
추운 겨울에 부채 준다고 괴상하게 여기지 마라
지금 너는 어려 어찌 알리오마는
살사병으로 밤중에 가슴에 불이 일면
오뉴월철 무더위보다 더 뜨거우리라.
한글로 된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을 쓴 인물이며 조선시대 반역과 이단의 상징으로 인목대비를 모략한 글을 쓴 죄로 사형 당한 인물 허균과 그의 누이 허초희(난설헌)의 시문과 그림은 그녀 사후에 중국에도 유명세를 떨쳤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높이 평가 받는 시대를 잘못 만난 위대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난설헌이 허균의 친누이였던 것과 달리 한 때 허균의 연인이었던 전라도 부안의 기생 계생의 시 몇 수도 이 책에 전해진다.
난설헌, 계생과 함께 이이화 선생님이 꼽은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은 황진이이다.
북한의 유명한 작가로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에 의해 소설로 쓰여지고,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최근에 개봉되기도 해서 더욱 화제인 황진희는 다재다능한 저항의 여인상으로 그려진다. 황진이의 것으로 전해지는 글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종실인 벽계수가 말을 타고 달리다 나자빠지게 했다는 전설의 다음과 같은 명문(117쪽)이 아닐까 한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 한데 쉬어간들 어떠하리
황진이가 유일하게 사모했던 인물로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스승이다. 이 책에서 조선의 3대 여류시인인 황진이, 난설헌, 계생이 모두 다 허균과 무관하지 않은 관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단면으로, 역사인물평이 저자의 사상이나 철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음을 추측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런 류의 책들이 여러 시각으로 쓰여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수많은 조선시대의 예술인들을 다루는데, 조선 초기에는 양반 시문을 다루다가 후기로 갈수록 여성과 중인, 상민의 세계를 가리지 않고 확장해 간다. 조선조 신분사회의 벽이 얇아지고 장르에 관한 보수성이 허물어 질수록 각계각층의 예술인들이 활동과 다양한 영역에서 인물이 발견된다.
중인문학, 여항문학의 뿌리가 되는 장혼. 불우한 환경 속에서 피어난 민중시인 조수삼, 그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악의 정수동, 친일파로 악명 높은 신소설의 선구자 이인직, 끝까지 절개를 지킨 시인 이상화, 나라 사랑의 출가 시인 만해 한용운, 월북하여 부주석까지 지낸 홍명희, 굴절된 친일파 육당 최남선, 판소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재효, 자신의 탕아적 삶을 회한하던 거문고의 명인 이원영, 더늠의 벽을 깬 독창적인 창법의 판소리꾼 송만갑, 중국에서 활동하며 조국을 그리워 하던 독립운동가로 중국의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던 정율성, 겸재 정선·관아재 조영석과 더불어 조선의 3재라 불리었던 화가로 강세황의 극찬을 받은 현재 심사정,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찌를만큼 과격했던 일세를 풍미했던 화가 최북, 아리랑으로 유명한 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등이 소개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서거정에 대한 가장 풍부한 인물평을 얻은 책이며, 춘원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평가받는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의 생애를 처음 훑어보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읽은듯한 내용들이 꽤 많았는데 지난 2002년에 출간된 '인물로 보는 조선사'(김영광, 시아출판사)와 유사한 기획인데다, 두 책에 나란히 소개되는 인물이 꽤 여러명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표절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이 부족하여 연구자료들이 대부분 유사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시류에 맞춰 전채적인 글솜씨를 빛낸 서거정의 삶과 그 반대편에서 교류하며 쌍벽을 이루던 저항 시인 김시습의 이야기는 각각 따로이면서 대비하여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이화 선생님의 김시습에 대한 애정은 책에서 차지하는 분량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만큼 이 책은 저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인물평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솔직히 옛 인물들이 남기고 간 자료의 양이 일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책들은 꾸준히 만들어져서 그 역사적인 평가들이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야할 것이다.
역사를 깊이 알지 못하는 나는 어러한 대충의 개인적 독후 기록을 남기고 지나가지만... 이이화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들의 더 많은 연구로 계속해서 논란도 되고, 새롭게 발굴되는 역사적 인물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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