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의 최장수 종합잡지
당시의 한 일 지식인(정치가, 사상가, 문인 등)들이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거나 국제여론 및 국민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기고한 글로 발간된 종합잡지로서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적 성격\'의 책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문학 등 일제하 시대를 연구 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각권당 유명인물의 초상이나 경승지 풍경 등의 사진과 본문의 주장, 시사평론, 논설, 인물품평, 잡찬, 문예 실업자료, 주요기사(통감부, 총독부의 공문 등)으로 조선문답, 만주문답, 시사일지의 순서로 편성되어 있다.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는 그 전신인 \"조선\"(朝鮮)까지 포함해서 무려 34년간이나 발행된 식민지 조선의 최장수 종합잡지다. 1908년 3월 창간된 \"조선\"은 1912년 1월(통권 47호)부터 잡지명을 \"조선과 만주\"로 개제(改題)하여 1941년 1월(통권 398호)까지 발간되었다. 호수는 처음에 권-호 체재였다가 1910년 3월호(25호)부터 통권 체재로 바뀌었다.
\"조선과 만주\"(The Chosen and Manshu)는 매월 1일 간행된 월간 종합지로서, \"태양\"(太陽)이나 \"일본과 일본인\"(日本及日本人) 등 당시 일본 본토의 대표적 종합잡지를 의식하여 만들어졌고 외부의 평판 역시 그러했다. 예컨대 창간 당시에 조선일일신문(朝鮮日日新聞)은 박문관(博文館)의 \"태양\"처럼 권두에 사진을 실었다고 평했고, 조선타임스는 잡지의 체재가 \"일본과 일본인\"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本誌\"朝鮮\"に對する批評」, \"朝鮮\" 제1권 2호, 1908년 4월).
본지는 원래 월간지지만 1912년 6월(통권 52호)~12월(통권 65호)처럼 한시적으로 월 2회(1일, 15일) 발행된 적도 있다. 종래 하층 일반인보다 상공인・지식인 등을 독자로 상정한 ‘딱딱한 기사’ 위주였던 것을 통속적인 ‘부드러운 기사’의 ‘15일호’ 간행에 의해 일반인까지 구독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다(本誌は月二回發行とせり, 통권 52호). 통속판을 표방한 ‘15일호’는 종래대로 국판 판형을 취한 ‘1일호’와 달리 국배판으로 판형을 키우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통속적’인 기사 편성에 성공하지 못했을 뿐더러, 실제로는 권당 25전이던 것을 2권 40전(권당 20전)으로 가격만 올린 꼴이 되자 결국 독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월 1회 간행 체제로 복귀한 것 같다.
\"조선과 만주\"의 표지는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원래 조선을 상징하는 닭과 만주를 상징하는 용이 일본의 상징인 태양 속에서 마주서 있는 도안이었다. 종래 \"조선\"의 표지는 떠오르는 해와 회를 치는 닭의 도안으로 시작되었는데, 한일합방 이후 만주로의 팽창이 현실적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잡지명과 표지 도안을 바꾼 것이다. 통권 73호(1913년 8월)부터는 한반도와 그 뒤에서 햇살을 비추는 태양으로 도안이 바뀌는데, 조선을 중국대륙 침탈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실제로 \"조선과 만주\"로 잡지명을 바꾼 데에는 대륙팽창의 제국주의적 지향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개제 배경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드러난다.
\"조선과 만주\"의 구성을 보면, 권두에 유명인물의 초상이나 경승지 풍경 등의 사진을 수록하고, 본문은 주장, 시사평론, 논설, 인물품평, 잡찬(雜簒), 문예, 실업자료, 주요기사(통감부・총독부의 공문 등), 조선문답, 만주문답, 시사일지 등의 순서로 난을 편성했으며 때때로 이슈가 생기면 시의적절하게 특집을 꾸리는 기동력도 발휘했다.
\"조선과 만주\"의 편집・경영・주필을 삼위일체로 담당했던 인물은 샤쿠오 슌죠(釋尾春芿, 1875-?)였다[釋尾의 발음에는 ‘도키오’도 있으나 그와도 절친했던 조선문제 저널리스트 아오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 1877-1932) 등 동시대인의 호칭에 따른다]. 샤쿠오는 교쿠보(旭邦)나 도호(東邦)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본지에도 매호에 걸쳐 ‘旭邦生’, ‘東邦生, ‘東邦山人’ 등의 필명으로 각종 논설을 집필하고 있다.
샤쿠오는 1908년 일한서방(日韓書房) 사주인 모리야마 요시오(森山美夫)가 저널리스트 기쿠치 겐죠(菊池謙讓)를 주간으로 \"조선\"을 창간했을 때 편집장을 맡았다. 모리야마가 1909년 3월에 일한서방의 사업을 확장한다는 이유로 그에게 경영을 맡기면서부터 샤쿠오는 \"조선\"의 경영과 편집을 전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발행처는 제3권 제2호(1909년 4월)부터 일한서방에서 조선잡지사(朝鮮雜誌社)로 변경되어 \"조선과 만주\"로 이어지게 되었다.
샤쿠오는 1911년 10월 만주 시찰을 다녀온 직후 잡지명을 ꡔ조선과 만주ꡕ로 바꾸기로 하면서 대련(大連)에 조선잡지사 만주지사를 개설했다. 그는 자신이 남북 만주 일대를 시찰한 결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주 경영과 지나(支那) 연구가 급선무임을 절실히 느낀 바 있어” 만주지사를 설치한다고 명시했다(앞의 글, 「本誌の改題」). 1910년 도쿄지국이 개설되고 1911년에 안동현(安東縣)지국, 평양지국, 부산지국에 이어 만주지사(1917년부터 대련지국으로 명칭 변경)가 설치됨으로써 조선 전국 및 만주 지역으로 판로가 확장되었다. 1912년 청진지국, 1917년 오사카 및 고베지국, 1918년 봉천(奉天)지국 등으로 이후 지국의 확충은 계속되었다. \"조선과 만주\"는 1918년 1월(통권 127호)부터 조선과 만주사(朝鮮及滿洲社) 발행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단지 잡지와 잡지사의 명칭을 일치시키기 위해서였다.
1935년 조선과 만주사 편찬으로 \"조선・만주 안내\"(이 책은 경인문화사의 한국지리풍속지총서 233-234로 복간되어 있다)를 교열・발간하는 등 조선과 만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도 계속 앞장섰던 샤쿠오는 1941년 1월에 노령을 표면적인 이유로 해서 \"조선과 만주\"를 폐간하게 된다. 샤쿠오는 폐간사에서 본지와 비교할 만한 잡지로서 \"실업의 일본\"(實業之日本: 1897-현재, 1964년부터 實業の日本으로 개제)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에 지령 35년 이상의 잡지는 열 종 이상 있지만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주재자가 변하지 않은” 것은 마스다 기이치(增田義一, 1869-1949)의 \"실업의 일본\" 뿐이라고 자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의 문화개척’에 기여하고 ‘선만개척과 대륙진출의 급선봉’이라는 역할을 수행한 ‘문장보국’(文章報國)이었다고 자평하고 있다(「本誌廢刊の辭」, \"朝鮮及滿洲\" 통권 398호). 이로써 34년에 이르는 \"조선과 만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