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를 읽고
어떤 재야 사학자의 큰 숨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를 읽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의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이희진이라는 한 자연인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들어보려 하였다. 그의 책갈피들 행간마다 그의 힘겨운 삶과 거기에서 오는 현실의 짐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또는 비주류로서 또는 약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역정이 어떠한가를 나 역시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의 내용의 흐름보다 저자의 의도에 시선을 고정시킨 게 잘못일까? 독자반응비평이라는 문학비평 용어를 여기 들이밀면 내 의도를 다른 이들에게 더 잘 이해시킬 수 있을까? 어쨌거나 나는 이희진의 글에 담긴 그의 속마음과 안타까움을 먼저 이해해 주고 싶었다.
「이희진.
"1963년 생"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한국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있다."」
책 앞표지 뒷면에 나오는 것으로, 이 책의 저자, 이희진의 소개 글에서 따온 내용이다. 이 글만 보고서는 그가 어느 대학에서 얼마 동안 가르쳤는지, 지금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에게 가르치는 일이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른바 대학의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인지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어쨌거나 이희진의 소개글에서 우리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반반한' 강단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뿐이다. 이른바 한국에서 '세칭' 일류대학으로 치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도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다면, 대한민국 강단의 형편을 고려할 때 이 역시 흔한 일은 아니다. 필시 이희진의 인생역정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대학 학번으로 치면 1982 학번, 대학은 그래도 세칭 일류대학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 이른바 '에스 대학'은 아니라도 사학계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대학의 학벌을 가졌다. 그런데도 그는 이것을 활용하여 강단 사학자들의 지위에 오르는 걸 포기한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마른 자리'에 가는 걸 거부한 듯하다. 게다가 '386 세대'에 그는 속한다. 그는 '1980년대'라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 삶에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재야 사학자 반열에 들어있는 이로 우리는 그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우리 시대는 이른바 보수 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을 입버릇처럼 떠들면서 자신들의 옛 영화를 되찾으려고 눈에 핏줄을 세우고 있다. 교과서의 내용마저도 잃어버린 10년을 지워버리는 쪽으로 고쳐간다고 나선 마당이다. 경제사정마저 어려워지면서 이들의 의도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먹고살기 어려운데 누가 역사에 관심을 갖겠는가, 말이다. 이런 척박한 시대에 나온 이희진의 책이 독자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역사책이 아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벌이는 우스운 행각을 적나라하게 소개해주는 '역사 관련' 책이다. 이 책이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되는 건 식민사학이 가지는 모순 때문이다. 식민사학이 역사학이 아니기 때문에 식민사학에 바탕한 역사 서술이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옛 일제의 정치철학이 담긴 식민사학이 우리 고대역사의 큰 줄기가 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식민사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권력의 생리를 빼놓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일제의 제국 권력의 생리를 무엇보다 먼저 파악할 때라야 식민사학의 정체는 밝힐 수 있다. 식민사학의 정체는 무한 권력을 지향하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 권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제국주의의 욕망을 우리 고대사학계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며, 우리 시대 강단을 장악하고 있다고 이희진은 설명한다. 황국사관이라는 것에서 시작된 식민사학. 제국 권력의 역사철학을, 우리 시대의 강단이, 우리 사회의 양심으로 존재해야 할 지성인들에게 아주 지속적으로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전수하고 있다고, 이희진은 고발한다.
식민사학. 이는 대중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서도 대중과는 거리가 먼 분야다. 나는 대학 시절 교양 한국사 시간에 잠깐 흥미를 보인 적이 있었다. 김구 선생, 신채호 선생, 안창호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한때 어떻게 식민사학에 저항해야 하는가,고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분들의 사상이 지나치게 감정에 매여 있는 게 아니냐, 생각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을 정리하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희진의 글과 함께 돌아다보니 나 역시 부끄러운 것 뿐이다. 식민사관에 오염된 강단아래에서 '역사 선생'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실증주의 사학이니, 랑케니 부르크하르트니 어쩌니 하면서 서구 사학자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였으면서도, 식민사학의 폐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으니 말이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역사관이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는지도 이제야 이해를 하게 된다.
한국고대사의 문제는 사료가 불충분한 게 사실은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 제국의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서 쓰고 가르친다는 게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더더욱 볼썽사나운 것은 "대한민국 고대사 학계의 식민사학 문제는 식민사학 자체의 논리보다 학계의 구조적 비리와 훨씬 더 밀접하게 얽혀 있다(74쪽)"는 것이다. 황국사관의 역사철학이 식민사학의 물줄기를 타고 우리 시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학자들의 치졸한 생존의 방식 때문이다.
이희진은 이 책에서 식민사학에 대해서 그간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얕고도 피상적인 것들인가를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의 심각성과 폐해 또한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식민사학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결국은 우리 민족의 존재 의의를 훼손하는 것 아닌가. 우리 민족의 존재 근거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제국주의 철학의 재생산과 보급에 충실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여느 식민사학을 하는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역사학과 인문학' 공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을 깨우쳐 주고 있다. 또한 역사와 권력의 관계가 얼마나 예민하고도 중대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생겨난 일들이 우리네 범인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도 이야기해준다.
식민사학의 문제는 한국 고대사학자들의 역사 서술의 시각과 방법이 치졸하고 유치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건 더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희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식민사학의 체계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세워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식민사학을 하는 이들이 벌이고 있는 구조적인 비리는 비단 한국 고대사학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학계의 구조적 비리가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저 보아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는 한국인들에게 식민사학이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 친일파 문제에 이상하리만큼 관대한 우리 사회가 식민사학이 내는 문제를 방치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지만은 않다 할 것이다.
이희진의 글이 강단 사학자들의 그것과 달리 거친 것도 한국 고대사학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식민사학의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역살철학과 역사서술 방식을 대체할만한 대안을 우리가 이희진에게서 기대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소수자로서 그런 일을 하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시대 재야사학자로서 큰 숨을 쉬고 있는 셈이다. 그 큰 숨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한국 고대사학계의 행태를 바로잡고 그들의 선전선동에 놀아나지 않으려고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면 이희진은 충분한 자기 역할을 한 것이다. 그의 큰 숨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그가 앞으로도 쓸쓸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리고 물리적인 여건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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