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기사]사무라이는 개인 자율성을 어떻게 추구했는가?
사무라이는 개인 자율성을 어떻게 추구했는가?
[서평] <사무라이의 나라(The Taming of the Samurai)>를 읽고
한정석 (pleamore)
1.어떻게 이 책을 나는 읽게 되었는가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에 대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이해는 여전히 짧고도 얕다. '미우면서도 본받고 싶은 구석이 많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 대해서 반대되는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에게 일본은 '미우나 고우나' 관계로 바뀌는데, 의아할 따름이다. 그런데 유독 '독도 문제'에 대해서만 일본에 대하여 혐오감을 앞세우고 그들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린다. 비난하면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과 올바로 이해하는 것.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일본에 대해서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죄업과 여전히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을 우리는 기억에서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두고두고 가슴에 간직하고 되새기며 그들과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생긴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비난하는 것보다, 그들이 만든 승용차를 사느냐 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다 볼 줄 아는 열성과 침착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기회가 내겐 우연히 왔다. 하지만 사무라이와 일본의 사회·문화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생각들이 피상적인 것들임을 알고서는 선입견과 편견을 줄여볼 생각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또한 이 책을 펼쳐가면서, 나 역시 일본에 대해서 적개심 외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채찍하면서 책 속으로 나는 깊숙이 들어갔다.
2. 책 제목에 대하여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원제가 번역본의 그것과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The Taming of the Samurai'이다. '사무라이 길들이기'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영어 제목은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일본의 엘리트 계급, 지배계급으로 살았던 사무라이들을 정치권력(또는 권력자)이 어떻게 다독여 권력 주변에 맴돌며 권력에 순응할 수 있게 했는지를 아주 상세히 추적해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아마도 독자층을 의식해서 잡은 듯한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우리 말 번역본의 제목 또한 책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1000여 년 동안 일본 사회를 호령했던 사무라이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방식과 그들의 문화가 일본 사회에 끼쳐온 영향이란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과 우리말본 제목의 거리만큼이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도 컸다. 1 천여 년이나 되는 사무라이의 활동사를 다루고 있는데다 사무라이와 정치권력의 길항관계 또한 면밀하게 다루고 있어서 조금은 산만하고 난삽하다고 느낄만하다. 일본 사회와 사무라이들의 정체와 활동 폭을 다루는데 구미의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들과 대비하고 그들의 이론을 적용하는 과정에 그만한 어려움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회학자가 보여줄 수 있는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저자가 특별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계급인 사무라이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지배계급으로서 사무라이들이 수세기 역사를 거치며 일본문화에 공헌한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사무라이 문화는 현대 일본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철저하게 고찰해 볼 가치가 있다(31쪽)."
이 책의 저자는 그간 서구인들의 시각 등 세간의 일본 문화 이해 방식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그런 이해들을 교정해 보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특별히 루드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보여주었던 일본 사회(또는 문화)의 '해부'의 결과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이 책의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열정과 문제의식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3. 사회적 공공성과 개인의 자기결정권
"개인성의 존중과 전통,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책임의 관계", 이 책의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사람들에게도 현대적 과제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는 또한 같은 글에서 "폭력과 소유의 제도적 규율화가 진행되었을 때 (중략) 개인의 자립정신을 함양하는 문화가 문명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하고 묻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케가미 에이코는 이 책을 통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무라이의 역사를 통해 사무라이 개인들이 집단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자율성, 즉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왔는지를 꼼꼼히 추적해 그 결과물을 에이코는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 에이코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주의와 집단성에 매몰되어버리기 쉬운 상황이 줄곧 전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그는 상기시킨다.
소유와 관계된 폭력, 그리고 개인의 명예 또한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던 사무라이들에게 자기결정권이나 자율성은 포기하기 어려운 가치였다. 저자가 이 책에서 수 차례 반복하고 있듯이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이행하기 이전에 사무라이들이 자기결정권이나 자율성을 지니기는 쉬웠다. 하지만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옮겨가면서 사무라이에게 자기결정권이나 자율성은 그들에게 중요한 가치인 소유와 명예만큼이나 놓치고 싶지 않은 현실적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들은 시대의 흐름, 사회의 변화에 역행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소유와 명예, 그리고 자기결정권 등의 가치들을 지켜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사무라이를 정치권력 또는 사회에 순응하게 한 각 시대마다의 정치권력의 놀라운 통치력과 통치기술의 역할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사무라이들의 충성과 긍지의 초점이 개인의 명예에서 국가나 애국주의로 옮겨가게 된 것 등을 저자는 사례로 들고 있다.
4. 일본의 국가형성과정과 사무라이의 명예문화
이케가미 에이코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명예와 출세를 위해 분투한다"는 홉즈(Thomas Hobbes)의 견해를 들어 사무라이의 명예 추구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며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인정하고 있다. 사무라이는 명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웅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지만, "성숙한 형태의 사무라이 명예문화에서는 영웅적인 무사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67쪽)"고 에이코는 이야기한다.
일본의 국가형성과정에서 정체(政體)가 바뀌면서 사무라이 명예문화도 바뀌어 갔음을 에이코는 자세히 그려내 보여주고 있다. 사무라이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분명히 달랐다. 특별히 도쿠가와 시대에 이러러 급변한 환경에서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다시 창조하고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9세기에서 10세기 경 출현한 사무라이는 원래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집단이었으며(89쪽), 폭력을 전문가답게 행사하는 게 그들에게 특유한 것이었다(103쪽)" 헤이안 왕조 후기, 가마쿠라 막부, 센고쿠 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무라이의 명예문화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지만 소유와 폭력성,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끝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권력이 안정된 도쿠가와 지배체제가 사무라이의 '명예의 폭력'을 억제하고 관리하면서 사무라이 명예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5. 명예문화의 재설정과 사무라이의 자기변화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의의 명예문화는 개인중심의 명예에서 '국가중심의 명예'로 이행하게 된다. 국가의 관료적 절차의 미로 안에 갇힘에 따라 사무라이 명예문화의 힘이 축소하면서, 사무라이는 무사생활 본래의 문화의 뿌리에서 떨어졌고, 명예문화의 무사적 차원이 쇠약해졌다(393쪽)고 저자는 본다. 명예문화에서 무사적 차원이 쇠약해지면서 도쿠가와 사무라이는 문화적 모순을 겪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 책의 저자는 특별히 도쿠가와 시대 이후 사무라이의 명예문화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 이후 사무라이가 문화적 모순을 안게 되었지만 변화된 시대에 창조적으로 적응하여 "비사무라이 문화와 제도에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496쪽)"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시기 사무라이 문화가 유교와 만나 학식과 정치능력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한 것(463 쪽)에 대해서도 저자는 후하게 점수를 주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사무라이 개인들에게는 피나는 자기수련과 그에 따른 자기변화가 있었다. 저자는 이런 자기변화를 높이 평가한다. "도쿠가와 사무라이 문화의 실제적인 재설정은 대체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많은 사무라이 개개인의 고투와 노력을 축적한 결과로 일어났다(497쪽)."
6. 명예문화의 도덕성과 내면적 역동성
이 책의 저자는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명예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저자는 '명예형 개인주의'을 높이 평가한다. 명예문화를 추구한 개인들은 결코 집단이나 사회의 공익만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자기 판단과 자기결정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러한 자기 판단과 자기 결정권을 일본의 명예문화 이해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543쪽)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가 사무라이의 명예문화에서 특별히 주목한 '명예형 개인주의(543 쪽), 자기 판단, 자기 의식, 자기 결정, '참된 자기 표현(541쪽)' 등은 베네딕트가 주목하지 못했던 "명예문화의 내면의 역동성(545 쪽)"이라고 저자가 지적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는 아마도 현대 일본사회의 개인들과 그들의 삶에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사무라이 명예문화의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다. 사무라이의 명예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소유와 폭력이었으며, "도덕과 정의가 아니었다(354)"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는 또한 "사무라이의 저항정신이나 도덕적 자율성은 사적인 수준의 도덕에 갇혀 보편 정치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437쪽)"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명예문화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지적이라 할 것이다.
7.글을 끝내며
이에카미 에이코가 이 책을 통해 보여준 지적 성실성에 찬사를 보낸다. 그가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가치중립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보려 한 것도 높이 사 주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예찬한 '하가쿠레'라는 책이 끼친 영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사무라이의 명예문화가 일본 군국주의에도 기여했다(427쪽)고 그가 지적한 것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코의 지적 성실성과 균형감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각에 아쉬운 것들이 몇 있다. 먼저, 명예문화의 폭력성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언급을 지나치게 적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무라이의 탄생이 처음부터 계급적 이해관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의 다른 계층이나 계급에게는 심각한 역작용 또는 역기능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들이 명예를 추구하고 공공선을 추구했다고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사무라이의 자율성이나 자기결정권과 관련시켜서 이해할 때에도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명예문화의 자기결정권도 지적할 수 있다. 저자는 명예문화의 자기결정권과 내면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공동체의식, 집단주의, 공공성, 공동선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명예문화에서 개인성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배 엘리트의 개인성이나 개인주의가 피지배 계층의 개인성이나 자기결정권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명예문화의 개인주의과 개인들 내면의 역동성이, 우리 시대 정치권력과 대립되고 있는 시민의 자기결정권의 가치와 연계시키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일본인 개인들의 내면의 역동성을 세계주의, 세계평화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한 것도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으로서 보여주는 한계라 할 것이다. 일본인 개인으로서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은 세계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공선을 추구하며 개인의 역동성, 자율성을 가진 일본의 시민으로서 산다는 것은 일본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의 울타리 안에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내면의 역동성이 한국과의 관계, 세계 시민들과의 관계라는 데 까지 공공성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본다. 지나친 욕심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말 번역본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한다. 많은 곳에서 교정되지 않은 오자 탈자가 눈에 들어온다. 번역 또한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며, 주술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곳도 더러 보인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라서 우리말 투가 가능할 텐데, 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 투로 옮겨진 것도 아쉬워 뵌다. 어쨌든 두툼한 책을 끝까지 성실하게 번역해 준 데 대해 역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가 '힘겹게' 수고하지 않았다면, 내게 있는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아직도 옛 그대로일 것이다.
첨부파일 사무라이.jpg
덧붙이는 글 | 이케가미 에이코 (남명수 옮김), 사무라이의 나라, 서울:지식노마드, 2008
2008.09.20 14:51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