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게, CEO에게 이런 직언을 할 수 있다면?

"만언봉사, 목숨을 건 직설의 미학"
율곡 이이 지음 / 강세구 옮김
꿈이있는 세상

이 책은 율곡 이이 선생님이 당시 선조임금의 구원에 의해 쓴 상소문입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고전을 일반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끔 잘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먼저 상소문이기에 당시 16세기 조선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느낄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국가 경영에 있어서 최고 지도자(왕, 대통령)의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들이 특히 돋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덕목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떤 조직에서든 필요한 사항으로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당시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과도 같은 임금에게 있는 그대로의 충정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율곡 선생님의 태도와 정신은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할 것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역사가 그냥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연결시켜는 고리와도 같다는 인식을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이신 율곡 이이 선생의 옛글을 대하면서 느껴보면 어떨까 합니다.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만언봉사萬言封事」는 율곡 이이 선생이 당시 선조임금의 구원에 의해 쓴 상소문입니다. 조선 선조 7년(1574) 1월 4일, 선조임금이 당시 어려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하들로부터 의견을 들으려는 구언求言의 교지敎旨를 내리자, 율곡 이이(1536-1584)선생님이 올린 상소문으로써 글자수가 11,600여자에 이르는 긴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봉사封事란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이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 선조 임금은 등극한지 7년이 되었지만 23세에 지나지 않았고, 율곡 선생은 39세로써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지 10년이 된 승정원 우부승지였습니다.

“사치가 크게 유행하는데 어떻게 고칠 것이고, 인심이 날로 사악해지는데 어떻게 교화할 것이며, 도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데 어떻게 막을 것이고, 군정軍政이 엄격하지 못한데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선조의 구언 중에서-

여기서 선조는 왜 신년 벽두부터 신하들에게 구언의 교지를 내렸을까? 그 배경이 무엇일까? 이는 곧 율곡 선생이「만언봉사」를 쓴 배경이기도 합니다. 우선 당시의 정치적인 흐름을 대략 살펴보면 조선은 연산군 4년(1498)부터 명종 즉위년(1545)까지 약 50년 사이에 네 차례의 대 옥사, 즉 4대 사화가 있었습니다.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인데, 대체로 조선 초기부터 집권해 오던 기성 관료세력과 성종 대 이후 등장한 사림士林 출신의 신진 관료세력 사이의 대립과 투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한 뒤, 첫 계비로 윤임의 누이 장경왕후를 맞이하여 원자 고를 얻고, 두 번째 계비로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를 맞이하여 왕자 경원대군 환을 얻었습니다.

왕실의 외척이 된 윤임은 대윤大尹,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 하여 알력이 심하였는데,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원자인 고가 즉위하니 바로 인종입니다. 이에 윤임의 대윤 일파는 정권을 잡고 윤원형의 소윤 일파를 축출한 뒤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병약한 인종이 즉위한 이듬해 1545년 7월에 병사하자 경원대군, 즉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권을 잡은 윤원형 일파는 윤임 일파에 대한 대숙청을 가하였으니 이 일련의 사건이 바로 을사사화입니다.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권력을 농단하던 윤원형 일파는 정계에서 축출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자, 그동안 전국 여러 서원 등지에 은거하던 신진 사림 세력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2년 뒤(1567) 명종마저 승하하고 명종의 동생 덕흥군의 아들인 선조가 즉위하였지만 연산군 이래 수십 년 동안 조선 조정은 정쟁의 회오리 속에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면서 군왕의 권위는 떨어졌고, 관직사회의 기강은 크게 해이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지경에 봉착한데다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고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명종 재위시만 하여도 기아에 허덕이거나 떠도는 백성들이 많았고, 도둑이 횡행하여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였습니다. 황해도를 근거지로 한 임걱정 일당은 당시 대표적인 도둑 떼였음을 왕조실록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왜구의 침입도 잦았으나 변방의 방어대책은 소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명종 조 말엽부터 선조 초기까지도 각종 자연 재해나 이상한 변화가 그치지 않았으니 선조의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선조가 즉위하여, 처음에는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가 신진 사림의 한 사람이던 동생 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1년쯤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곧 선조의 친정 체제로 들어가자 국정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중앙 정계에는 재덕을 겸비한 사림 출신의 많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정치적 경험이 적은 선조는 개혁해야 할 많은 현안들을 앞에 두고 여러 문신들에게 둘러싸여 우왕좌왕하면서 제대로 정치적 소신을 펴지 못했습니다. 즉 시급히 해결해야 할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으면서도 훌륭한 인재들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고, 당시 여러 신하들은 연산군 이후 크고 작은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은 뒤라 그 두려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언행을 몹시 삼가하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조도 즉위 이후 여러 번 구언을 하였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즉위한지 7년이 지난 1574년 새해에 접어들어 이번에는 어떤 의견이라도 접수하여 탓하지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간곡한 교지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에 율곡 이이 선생은 <만언봉사>를 통하여 시의 적절한 변법을 통하여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정치를 함에 있어 정성을 들여 하는 실공實功을 강조하였으며, 임금은 자신의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수기안민修己安民을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즉, 이것에 힘쓰지 아니하면, 비록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서로 만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 하면서 당시 문제점을 상세히 지적하는 동시에 임금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대책을 아뢰었습니다.

당시에 ①상하가 서로 믿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②신하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책임지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③경연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④어진 이를 구하여 쓰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⑤재난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⑥여러 정책이 백성을 구하는 실공이 없다는 것 ⑦인심이 선을 향하는 실공이 없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선조가 적극적으로 나서 개선에 앞장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나아가 여러 대책을 제시하며 우선 임금이 바뀌어야 할 조건으로 ①삼대의 융성한 시대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을 기약해야 하고 ②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에 진력해야 하고 ③치우침을 없게 하여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갖추어야 하고 ④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여 유익함을 얻어야 한다고 선조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또한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①정성된 마음을 열어 여러 신하들의 참뜻을 얻어야하고
②공안을 고쳐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야 하고
③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하는 풍속을 개혁해야하고
④선상의 제도를 고쳐 공천의 고통을 구제해야하고
⑤군정을 개혁하여 내외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율곡 선생은 선조에게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간곡히 주장을 펼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였습니다.

“언로를 활짝 열고 올바른 의견을 들으십시오! 소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년을 해 보시어 나라가 일어나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고, 군이 정예화 되지 않는다면, 전하를 속인 죄로 신을 다스리시어 요사스런 말을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로 삼으시옵소서.”

사실 율곡 선생이 선조 임금에게 끊임없이 개혁을 호소한 것은 개혁의지가 부족한 선조의 우유부단한 태도에도 큰 원인이었습니다. 최고 통치자가 시국의 어려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면서 손을 놓고 있다거나, 옛 법과 제도에 얽매여 난국을 헤쳐 나갈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면 폐단이 누적되어 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사태로 빠지기 마련입니다.

율곡 선생이 항상 지적하였듯이, 그 피해는 결국 민생이 입게 되고 종국에는 국가 안위에 직결됩니다. 그리고 선조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이 나라의 난맥상을 안일하게 판단하여 개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선조 역시 이들의 구태의연한 태도를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최고 통치자의 판단도 그를 보필하는 참모들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할 것입니다. 주변 인물들이 현실에 안주하여 직언直言을 회피한다거나, 낡은 습성에 젖어 시기와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변통할 줄 모른다면 이는 자칫 국정을 그르치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 선생은 항상 고난에 처한 민생의 편에서 국정의 나아갈 길을 생각하였고, 임금을 인도하려 하였습니다. 율곡 선생과 같은 재덕을 겸비한 선구자의 출현이 절실한 때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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