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일상》을 읽고

[서평]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을 읽고

남만큼만? 생명공학기술이 열쇠?
가난한 흥부네 자식새끼만 많다란 옛말은 더 이상 모두가 수긍하는 정답이, 일반상식이 아니다. 불임과의 전쟁은 오래 전에 선포되었고 어느덧 「유전유자有錢有子무전무자無錢無子」의 교차로에 접어들었다. 자식양육에 있어서도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그다지 신기하진 않을 것이다. 시쳇말로 「두당 일억」이란 엄청난 양육비용에 결혼적령자들은 여러모로 생각과 고민이 많다. 이미 손자까지 본 어르신들은 농삼아「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씀도 하지만, 가부장적 풍토가 굳건한 한국사회에서 실제로 무자식은 욕으로 다가오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범주로 분류된다. 어떤 이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사리 주류범주에 안전하게 편입되지만, 다른 어떤 이는 피 터지는 노력과 투쟁을 벌어야 겨우 들어갈까 말까하다.

현재 국가적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출산장려책은 대중매체에서 흔히 보여지듯 선정주의로 범벅이 된 저출산위기론과 혈연가족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등에 업고, 불임부부에 대한 의료적 개입과 지원을 정당화하고 있다. 간절히 피붙이를 원하는 불임부부에겐 얼핏 희망의 동아리줄로 보여질 그 치료방법이 바로 한창 주가가 치솟고 있는 보조생식기술ART이다. 문제는 이러한 ART기술이 불임부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은폐되는 부작용과 높은 실패확률 등으로) 이중삼중으로 가중시킬 뿐이다. 글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이미 한 집단이 종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술발전은 기존의 착취를 경감하기 보다는 강화한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면에서 보조생식기술은 남성중심사회의 손에서 여성을 더 많이 착취하고 종속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다.」 p.80

「인간게놈프로젝트와 함께 떠오르는 생명공학산업의 그늘 아래서, 인간의 다양성을 유전적 인과율에 의한 것이라 여기는 하나의 세계관 속으로 이질적인 행위자들〔불임환자, 난쟁이 그리고 소위 아픈사람들〕이 재배치되면서 말려들고 있다.」p.101

아울러 보조생식기술은 또다른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생명경제차원에서 점차 세계화되는 ART같은 치료기술과 의료산업의 상술로 인해「자궁을 빌려주는」 대리모의 문제나 유전학담론에 기댄 우생학적 차별문제와 같은 생명윤리이슈가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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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적 시기는 그 시기만이 갖고 있는 지배적 가치가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 가치는 「바로 선택을 통해 자기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의 반강요에 가까운 개인정체성형성과 자기돌봄의 윤리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책제목《프랑켄슈타인의 일상》에서 암시하듯 우리는 이미 생명공학산업을 거룩하신 아버지로 삼아 해피드러그(happy drug) 같은 간편한 바이오약물을 혈관에 투입하고 주기적으로 정기검진 받는 괴물프랑켄슈타인이 되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우리 스스로에게 프랑켄슈타인을 보살피는「프랑켄슈타인박사」의 역할까지 떠맡을 것을 강요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비만과의 전쟁이 흔한 예가 될 것이다. 연예인 뺨치는 키와 미모 그리고 근육질과 S라인에 대한 갖가지 동경도 그러하다. 선택과 진보 그리고 완벽함을 강요하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풍토 아래서 나름대로 업그레이드된 우생학적 사고방식이 사회곳곳에서 향기로운 독버섯처럼 번져나간다. 언젠가 개인의 건강지수처럼 직계가족의 유전자지수도 수우미양가로 평가되지나 않을까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생명공학기술의 발달로 영화《가타카》에 묘사된 사회상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 각양각색의 클리닉과 제약회사로 진을 친 생명공학산업은 실제환자뿐만 아니라 잠재적 환자라 볼 수 있는 건강한 일반시민을 고객층으로 삼아 판촉광고에서 이른바 맞춤형생산을 강조하는「선택의 수사법」을 구사한다. 대형할인매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처럼, 난자/정자와 대리모 그리고 장기조직도 맞춤형 주문방식으로 고객의 필요와 조건에 기대어 구매가 가능해지고, 인도와 같은 제3세계의 의료산업은 한술 더 떠 치료과정과 관광여행을 함께 패키지로 묶어 판매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생명공학의 상업화와 상품화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정부와 언론매체, 실험실 뿐만 아니라 다국적 연구와 무역공조시스템, 그리고 생명공학 생산과 소비에 대한 국가의 공적투자와 우리들의 사적투자행위 모두를 포함한다.

페미니즘적 시각과 비판적인 인류학적 상상력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개인적인 관심은 이론분야에 쏠렸다. 과연 페미니즘적 시각과 인류학적 상상력이 유전자복제, 배아줄기세포치료, 보조생식기술, 사지연장술, 성장호르몬, 장기매매, 난자매매 등으로 대표되는 생명공학시대에 그리고 건강위생을 둘러싼 우리의 일상적 실천에 도대체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글의 저자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런 시각과 상상력이 단순한 알권리나 개인의 동의나 선택의 차원을 넘어, 일상생활 속의 정경구조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과학기술이 「몸」(개인신체와 사회신체)에 미치는 과정과 영향 그리고 의료윤리의 제도화가 가지는 한계를 밝혀준다는 점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 속에서 제도적 차원의 사법적-정책적 입안과제를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는 점과 이 두 접근방식을 모두 적용한 한국사례에 대한 경험연구의 부재다.

먼저 페미니즘적 태도는 일상적인 것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란 명제를 상기시킨다. 신체검사나 암정기검진과 같은 예방의학은 항상 권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선별과 배제의 시스템이다. 특히 여성의 몸은 생산경제와 재생산경제 그리고 서비스경제에 모두 얽매여 있다. 그러므로 소수자 여성의 인권문제와 착취는 보다 심각한 상태다. 다음으로, 비판적인 인류학적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체권력의 순환구조와 그 거시적 맥락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만든다. 생명공학의 상업화와 산업화는 또다른 생체권력의 차별과 억압을 생산/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경맥락하에서 생명공학을 둘러싼 생산/소비와 재생산은 이미 국경을 넘어선 전지구적/지역적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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