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언니(?) 정미소는 고등학생이 된 뒤로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주님이 보내신 것으로 짐작되는 십자가를 셋이나 짊어진 탓이다. 첫 번째 십자가 김설희는 바보 천치에 손버릇이 사납다. 두 번째 십자가 민예은은 착한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깔아뭉개기 일쑤다. 세 번째 십자가 조아라는 제멋대로에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세 십자가 모두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자신의 친구로 삼기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세 인간의 밥이자 껌이자 사물함이자 알리바이 주식회사 노릇을 그만두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수준 낮은 세 인간에게 휘둘리느라 영혼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지만 말이다.
유복한 셋과 곤궁한 제 처지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도 싫다. 재작년 재개발로 살던 동네에서 밀려난 뒤, 미소네는 줄곧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부모님은 십일조가 부담스러워 ‘가나안(거꾸로 하면 안 나가)’ 신자가 된 지 오래고, 급기야는 어렵사리 꾸려 오던 과일 가게마저 접어 버린다. 그 바람에 미소도 덩달아 가나안 신자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달랑 영어와 수학, 두 과목을 수강하던 학원마저 끊어야 할 지경이다. 세 십자가에게 꿀리지 않을 거라고는 기껏해야 성적뿐인데 말이다.
미소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홀로 교회를 찾는다. 주님께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고 마구 따지고 싶기도 하고, 내 인생을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매달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헛헛한 가슴을 채우기도 전에 시험에 들고(?) 만다. 조아라 남자친구를 소개 받는 자리에 함께 나왔던, 입에 올리기도 거북살스러운 안성기라는 이름을 가진, 동그란 눈에 까만 눈동자가 가득해 차라리 ‘강아지 눈’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 아이가 미소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묻자 “좋으니까 그러지.” 강아지 눈은 대답한다. 미소는 가슴이 쿵 내려앉고 다리가 풀린다. 하지만 강아지 눈이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후다닥 달아나기 바쁘다. 강아지 눈은 저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는 “장난이야.” 말할 게 틀림없으니까. “진짜인 줄 알았어?” 비웃을 게 틀림없으니까. ‘저런 미치게 괜찮은 애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건 그야말로 개그 콘서트’니까. 그리고 얼마 뒤 미소는 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만한 장면을 목격한다. 걸 그룹 뺨치게 예쁜 여자아이가 강아지 눈을 “안!” 하고 부르며 다가드는 모습을 말이다.
미소의 시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 담임 목사이자 학교 성경 선생이 불법 도박으로 검거된 탓이다. 미소는 충격에 휩싸여 중간고사를 하나하나 망쳐 간다. 그리고 그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인생 최악의 성적을 받게 된다.
제 인생이 너무나 시시해서 그냥 다 망쳐 버리고 싶던 어느 날, 미소는 제 발로 다모아교에서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너는 특별하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서. ‘기독교와 불교와 동학, 그리고 주님께 불림 받은 모든 깨달은 자들의 좋은 사상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이 종교가 시시한 제 인생에 빛을 던져 주길 바라면서.
제1장 아담의 유혹
세 개의 십자가
천사 또는 미친 새끼
불 꺼진 미래
끝나지 않는 시련
아담의 유혹
피하고 싶은 진실
돌아온 십자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건전하고 순결한
제2장 불신 지옥
길 잃은 어린 양
마귀가 창궐했도다
어린 양에겐 목자가 필요해!
시시하고 시시하고 시시하도다
제3장 진흙 인간의 꿈
아버지의 품에서
업장 소멸의 길로
또 한 마리 어린 양이
최악의 방해꾼
희망
늘신놀신하신하라
제4장 구원
드러난 비밀
대체 왜?
쾌락의 성지
다시 심장이 뛴다
난생 처음 프러포즈
내 우주의 중심 이동
제5장 사라진 십자가
괴물 사냥
나의 성스러운 아이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열일곱 내 인생,
누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제발!
교회 언니(?) 정미소는 고등학생이 된 뒤로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주님이 보내신 것으로 짐작되는 십자가를 셋이나 짊어진 탓이다. 첫 번째 십자가 김설희는 바보 천치에 손버릇이 사납다. 두 번째 십자가 민예은은 착한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깔아뭉개기 일쑤다. 세 번째 십자가 조아라는 제멋대로에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세 십자가 모두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자신의 친구로 삼기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세 인간의 밥이자 껌이자 사물함이자 알리바이 주식회사 노릇을 그만두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수준 낮은 세 인간에게 휘둘리느라 영혼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지만 말이다.
유복한 셋과 곤궁한 제 처지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도 싫다. 재작년 재개발로 살던 동네에서 밀려난 뒤, 미소네는 줄곧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부모님은 십일조가 부담스러워 ‘가나안(거꾸로 하면 안 나가)’ 신자가 된 지 오래고, 급기야는 어렵사리 꾸려 오던 과일 가게마저 접어 버린다. 그 바람에 미소도 덩달아 가나안 신자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달랑 영어와 수학, 두 과목을 수강하던 학원마저 끊어야 할 지경이다. 세 십자가에게 꿀리지 않을 거라고는 기껏해야 성적뿐인데 말이다.
미소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홀로 교회를 찾는다. 주님께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고 마구 따지고 싶기도 하고, 내 인생을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매달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헛헛한 가슴을 채우기도 전에 시험에 들고(?) 만다. 조아라 남자친구를 소개 받는 자리에 함께 나왔던, 입에 올리기도 거북살스러운 안성기라는 이름을 가진, 동그란 눈에 까만 눈동자가 가득해 차라리 ‘강아지 눈’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 아이가 미소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묻자 “좋으니까 그러지.” 강아지 눈은 대답한다. 미소는 가슴이 쿵 내려앉고 다리가 풀린다. 하지만 강아지 눈이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후다닥 달아나기 바쁘다. 강아지 눈은 저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는 “장난이야.” 말할 게 틀림없으니까. “진짜인 줄 알았어?” 비웃을 게 틀림없으니까. ‘저런 미치게 괜찮은 애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건 그야말로 개그 콘서트’니까. 그리고 얼마 뒤 미소는 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만한 장면을 목격한다. 걸 그룹 뺨치게 예쁜 여자아이가 강아지 눈을 “안!” 하고 부르며 다가드는 모습을 말이다.
미소의 시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 담임 목사이자 학교 성경 선생이 불법 도박으로 검거된 탓이다. 미소는 충격에 휩싸여 중간고사를 하나하나 망쳐 간다. 그리고 그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인생 최악의 성적을 받게 된다.
제 인생이 너무나 시시해서 그냥 다 망쳐 버리고 싶던 어느 날, 미소는 제 발로 다모아교에서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너는 특별하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서. ‘기독교와 불교와 동학, 그리고 주님께 불림 받은 모든 깨달은 자들의 좋은 사상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이 종교가 시시한 제 인생에 빛을 던져 주길 바라면서.
가장 잘나갔을 때의 나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정미소는 첫눈에 호감이 가는 아이는 아니다. 어찌 보면 좀 재수 없기까지 하다. 자신과 친구들을 성과 속으로 가르고, 한 수 아래로 내려 보는 태도(그래 봐야 겉으로는 티도 못 내지만)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가 너덜너덜해져 가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둘러 입은 갑옷에 지나지 않는다. 제가 못 가진 것을 갖고 싶다고, 제가 못 가진 것을 가진 친구들이 부럽다고 입 밖에 내는 순간, 갑옷은 우수수 벗겨져 나가고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져 내릴 테니까.
미소는 성처녀의 갑옷을 꼭꼭 껴입은 채로 지질한 제 삶을 끌어올려 줄 동아줄을 향해 발돋움을 거듭한다. 그러나 동아줄은 손에 닿지 않거나 썩어 있기 십상이라 나동그라지고 또 나동그라질 뿐이다. 특별하고 싶지만 무엇 하나 특별할 게 없는 이 아이의 발버둥을 지켜보노라면 어느덧 자기 연민에 가까운 연민이 인다. ‘나는 중학교 때의 나보다 아니, 내가 가장 잘나갔을 때의 나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미소의 고백이 여느 열일곱들의 속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작가 이경화는 아이들이 지질하다고 여겨 외면해 온 속마음=욕망들을 꺼내 볕을 쬐어 주고 바람을 쐬어 준다. 그 지질한 욕망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지질함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라고 다독거려 준다. 그리고 덤으로 사랑하는 이의 눈 속에서 ‘신’을 발견하는 순간에 대한 기대감까지 안겨 준다.
미소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건 기독교도 다모아교도 목사님도 아버지(교주)도 아닌 강아지 눈이다. 강아지 눈은 번민에 휩싸인 인턴(?) 수녀 같은 미소의 삶에 불쑥 쳐들어와 신에게로 향해 있던 눈길을 자신에게로 끌어내리고 다시 미소에게로 되돌린다. 강아지 눈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은 성스럽고 또 특별하다. 강아지 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 우주의 중심이 된 듯한 고양감마저 든다. 교회에서 느낀 고양감이 그랬듯, 다모아교에서 느낀 고양감이 그랬듯, 이 고양감도 결국에는 사그라질 걸 안다. 하지만 더는 불안하거나 헛헛하지 않다. 성스러움과 상스러움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는 게 사람이란 걸, 수많은 찰라들 사이에 이따금씩 영원 같은 찰라가 스쳐 가는 게 인생이란 걸 조금은 알 듯도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