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어른들은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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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누가 더 놀랐을까
글쓴이:도종환
그린이:이은희
출판사:실천문학사
이 책은 동시집이다. 이 책에는 도종환이라는 사람이 쓴 동시들이 아주 많이 있다. 그 중 내가 본 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들려주겠다.
병아리 싸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다리가 부딪쳤다고
눈 부라리고 깃털 곧추세우며
"어쭈 해보겠다는 거야!"
"그래,한번 붙어보자 이거지?"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다가
그냥 보리수나무 밑으로 간다
붙었다고 꼭 싸우는 건 아니다
그냥 한번 기싸움 해보는 거다
하루가 멀다 하고 툭탁거리지만
그렇다고 꼭 싸우는 건 아니다
나무 밑에서 쉴 때는 같이 쉬고
잠자리 쫓아 달려갈 때도 같이 간다
괜찮은 동시라고 생각한다. 꼭 우리 친구들과 나를 바라보는 그런 책이다. 역시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 같다. 병아리로 비유했어도 참 좋은 시이다.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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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큰 아들 준영(Michael)이 쓴 글이다.
제목 : 누가 더 놀랐을까
지은이 : 도종환
출판사 : 실천문학사
이 책은 동시집이다 도동환이라는 사람이 쓴 동시집을 모아놓은 책인 대 난 별로 호감이 없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대 글 책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런대 이야기가 있는 소설도 아니고 동시집을 읽으라니...
동시집을 읽고 나는 어떤 식으로 독후감을 쓸까 생각해봤다.
그런대 책을 읽다보니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
시제목: 매실
어른들은 꽃만 보고
열매는 못 봐요
열매만 보고
나무는 못 봐요
꽃이 왜 이 모양이야
열매가 뭐 이래
그러면서
나무가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건
보지 못해요
나무가 활기차게
자라야
꽃도 있고
열매도 있는 건데 -
이 시는 그래도 내가 이 책에서 본 시중에 제일 괜찮다고 생각된다. 어른들은 항상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정작 우리가 보길 원하는 것은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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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둘째 아들 요셉(Joseph)의 글이다. 맞춤법, 띄어쓰기 ... 하나도 고치지 않고 옮겼다.
누가 더 놀랐을까
동시(童詩). 동시란 ‘아이들의 시’, 혹은 ‘어린이 노래’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런 ‘어린이 ...’ 노래를 어른이 쓴다. 좀 역설적인가? 아니면 반어적인가?
도종환 시인이 구구산방에서 “산골에서 지낸 지난 몇 해 동안 동시를 쓸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라는 표현이 딱 맞는 말이다. 아마 시인이 시골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시 - 동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이 동시를 “썼다”라고 표현했지만 내 경험으로는 쓴 것이 아니라 “저절로 스며 나온 것” 이다. 행복에 겨워, 저절로 깨달아 체득된 자연에 겨워 저절로 나온 것 - 동시. 작가가 시인이어서 동시로 나온 것이다.
“자연” 이란 한자어는 自然 이고 이 뜻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시인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자연 상태로 놓아둔 시골생활에서 자연히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자연을 체득하고 깨달아 갔을 것이고, 그 안에서 시인의 창조적 문학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동시를 표현해내고, 드러나게 한 것이므로 이 아름다운 시들은 시인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통로를 통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
[누가 더 놀랐을까]는 총 4부로 나누어진 동시집이다. 이 시 - 노래는 제1부 채송화는 작은 꽃, 제2부 병아리 싸움, 제3부 도라지꽃밭, 제4부 아기 울음소리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시의 아름다운에 비해 4개의 구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이고 인위적이다. 자연스러운 시에 자연스럽지 못한 시집의 형식 맞추기가 안타깝다. 생태지도 적 차례 나눔이거나 시인이 머물렀던 시기별 차례 나눔이었다면 더 좋았을 걸 싶다. 마당에는, 울타리에는, 마을 어귀에는, 산에는, 들에는, 고추밭에는 ... 이런 식의 차례 나눔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체송화나 병아리 또는 작은 것들로 표현된 어린이, 부용꽃이나 해바라기 또는 큰 것들로 표현된 어른은 너무 도식적이다. 그저 “키 작아도 예쁜 꽃 / 얼마나 많은데요 / 채송화는 작은 꽃 / 작아서 더 고운 꽃” 에구구 ‘작다=예쁘다’라는 수식이 어디 보편적인 감상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맹신적인 요구사항이다. 채송화가 예쁜 것이 작아서 예쁜 것인가? ‘작지만 예쁘다’거나 ‘작은 꽃 예쁜 꽃’이어야 옳지 싶다.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너무 짙다.
이런 주관적 강요(?)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자연을 들여다보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여백을 [누가 더 놀랐을까]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준 시인 도종환 역시 사람 농사꾼 중의 하나이다. 내가 아는 어느 농부는 밭을 매다가 호미로 개구리 뒷다리를 찍는 살상(?)을 접하고는 땅 파기를 하지 않고 농사지으리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경운은 물론 호미로 굳은 땅 북돋우기도 하지 않겠다고. 나 살자고 개구리 뒷다리를 찍을 수도 있는 호미파기는 죄라고.
우리 모두가 동시를 쓸 수 있는, 저절로 그러한 것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들, 장소들, 경험들의 시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우리 가족은 그래서 시골생활을 이미 7년 전에 택했고 지금은 만끽에 만끽을 더하고 있다. 저절로, 행복에 겨워서, 배시시 ... 이 행복에 겨운 날마다 기쁜 하루를 시인의 동시 [누가 더 놀랐을까]를 통해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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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준영, 진영의 엄마가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