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書鎭)을 보며......,

내가 붓을 들어 붓질을 할 때 쓰는 서진書鎭, 또는 문진이다.
십장생이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다. 서진의 빛깔은 아주 그윽한
자색紫色이다. 팥죽 색깔이 은은하고도 짙은 질감으로 눈이
호사를 한다. 약 14년 전에 선물 받은 자색 벼루와 한 질로
되어 있다. 늘 아끼며 쓰고 있다. 서진이란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 문진文鎭. 서예에서는 돌이나 쇠로된 막대기 형태의
물건이다.
소소리바람회오리바람 이는 늦가을 밤이나 겨울밤에 화선지 위를 누르는 품이 자못
겅중 뜨지 않아 믿음직스럽다. 들떠있는 마음을 지긋이 눌러주고 겨울 삭풍이
문 사래에 걸려 넘어져 문 틈새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기운을 장 잡아주니 그
너름새야말로 짜장정말 으뜸이다.
손 싸게 놀리는 붓질에도 덩그마니 장중한 틀거지를 지키고 있으니 아흐! 장부심丈夫心이고녀!
늘 떠나되 머무르고 늘 머무르되 떠나는 게 삶이 아니던가. 진중한 서진의 품새는 이끗에
휘둘리지 않는 장부심이 아니던가! 기특헌지고! 어느 가을날 무서리 내리던 날 어린 외손자는
외조부를 그리며 붓질을 하였다. 장 외조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었으리라! 그게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으니 내가 천자문을 보고 임서를 하던 때였지, 아마? 보리곱살미꽁보리밥를 먹던 고향의 서산으로 해는 너울너울 넘어가는 때였지. 겨울밤 건너편 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리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어린 가슴에 물너울처럼 파고들었지. 시방 생각해도 달빛 괴괴한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부엉이 소리는 외얽이 흙벽에 스며드는 그 무엇이었나 보네. 문 사래에 걸린 서낙한무성하다 달빛에 격자무늬 창살의 그림자가 방안에 그득히 쏟아지고 있었지. 겨울 된바람이 골짜기의 떨어진 이파리 으르렁 시르렁! 거리며 훑어오며 문창호지를 핥아 파르르! 겨울의 독기를 품어냈었네.
서진은 문방사우 축에 끼지 못하고 외톨이로 돈다. 아예 그 틈에 끼일 느자구싹수가 없는 것이다. 붓질을 할 때 장 대모중요한 것은 역시 서진이 아닌가! 화선지를 몰강스럽게 꽉 잡아 주는 게 그렇다. 늘 화선지를 잡도리해 주고 있다.
단기 4344년 2월 25일
충주에서 불이당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