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복숭아, 오얏나무 아래 길은 나고
충주신문에 게재되었던 칼럼입니다.
미력하나마 올립니다.
불이당 강상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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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무수한 인물이 나고 이름을 남기고 죽어갔다. 역사는 이름난 이들에 의해 쓰이어진 기록의 산물이 아니다.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버리며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들에 의해 오히려 역사는 이루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숱한 인물들이 바람에 머리를 빗고 내리는 비에 머리를 감는 자세로 풍진 세상의 삶을 살아간 이들이 허다하다.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극명하고도 파란만장한 장강을 흐르는 드라마틱한 삶을 그려낸 이들에 의하여 역사는 늘 들메끈(신이 벗어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끈)을 조여 왔는지도 모른다. 전쟁터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거나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명멸明滅한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낸 밑거름이 되었는지 모른다. 한漢 나라 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와 같이 팔이 길었으며, 키 또한 컸다. 늘 장졸들과 있을 때에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데 유사시 군대의 진영을 그렸다. 그는 활의 명수였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숨어있는 호랑이를 보고 힘껏 활을 쏘았더니 명중하여 박혔다. 가까이 가보니 바위였다. 이에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연거푸 몇 번을 돌에 화살을 쏘았으나 박히지 않았다. 또 그는 전쟁터에 나가 마실 물을 보면 목마른 부하들이 물을 다 먹기 전에는 물 근처에 가지 않았으며, 배고픈 부하들이 밥을 다 먹지 않으면 그 또한 먹지 않았다고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한 말은 어눌하여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임금이 내려준 하사품은 휘하의 장수들에게 나누어 준 청렴한 그였다. 그는 일체 집에 축적해 놓은 재산이 없었으며, 죽을 때까지 집안의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원전 129년 그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으며, 그 후 다행히 탈출하였으나 그는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그 뒤인, 기원전 119년 그는 나이 60이 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을 한다. 그는 이때 대장군 위청衛靑의 막하에 있었는데, 위청의 주력부대와 회합하는데 늦었다. 이는 위청이 일부러 그를 늦게 오게끔 술수를 쓴 때문이었다. 이에 대장군이 비난의 말을 쏟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을 기회를 가졌지만, 대장군이 나를 후방 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탁상 공론하는 이와는 상대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의 죽음은 대장부로써 장렬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휘하 장졸들은 물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곡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흉노족은 그를 ‘날쌘 장군’, 곧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러 그가 있는 곳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 권 109 「이장군열전」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그는 윗사람의 거동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일을 수행하며, 윗사람의 거동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일을 수행하지 않았다. 내가 보건데 그는 아랫사람처럼 자신의 허물을 깨달아 깨우치려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입으로 말을 꾸며내지 않았던 인물이다. 옛말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데도 그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난다’ 하였다.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이 말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큰 뜻을 담고 있다.”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백의종군을 하며 수차례 모함을 받았던 한나라 무제 때 인물인 이광(李廣 : 기원전 ?~119)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 시대에 비쳐질까 곱씹어 본다. 역사에 이름을 이처럼 초개같이 남긴 이는 드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