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여왕의 저주. 그리고 도굴꾼 주변인의 최후
이집트의 제 18왕조의 아모세 1세는 힉소스 인을 몰아내고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BC 1560년 대가 이집트가 번성을 구가하는 시작점입니다.
힉소스 인들은 전쟁을 아주 잘할 뿐만 아니라 청동기 무기와 전차를 이용함으로써 이집트인들이 두려워하는 외세의 민족이었습니다. 힉소스라는 뜻은 이집트어로 "싸움을 잘하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무더운 여름 잠시 머리 식힐 만한 괴담이 있어 간단히 이집트의 얘기 하나 소개합니다.
투트모세 2세의 딸인 하트셉수트 영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전하고자 합니다.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아모세 1세 → 아멘호테프 1세 → 투트모세 1세 → 투트모세 2세 → 하트셉수트 → 투트모세 3세
...
이렇게 왕족이 이어집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스핑크스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3세의 섭정으로 성공적인 이집트의 여왕이 되어 정치를 마무리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이 없어 다음 왕을 서출 출신인 조카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아마 섭정을 통하여 하트셉투트와 갈등이 많았을 것이고 그녀를 무척이나 증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한 울분을 달래기 위해 투트모세 3세는 대외원정을 많이 나갔으며 큰 전과들을 다수 세웠습니다. 투트모세3세는 하트셉투트가 죽고 난 뒤 그의 무덤과 신전에 모든 흔적을 지우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둘간의 갈등을 가볍게 이해하시는 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투트모세 3세
죽어서 이 광경을 지켜본 하트셉수트는 얼마나 울분을 토했을까요? 실제로 그러한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의 유물들은 투트모세 3세의 행동으로 인하여 무두 저주가 붙었다고 시민들은 생각했답니다. 투트모세 3세의 통치 기간 중 이집트는 성서에 나오는 7가지 고통에 시달렸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추적하던 이집트 병사들은 바닷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곳이 성서에 나오는 홍해입니다. 일각의 고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홍해가 아니라 나일 삼각주라는 설들도 있습니다.

모세, 홍해의 기적
바다가 갈라졌다는 이야기는 산토리니 호수의 화산폭발로 인하여 때를 같이한 일시적인 간조현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와 유대인들은 이때 썰물로 빠져나간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말이 되는 흥미로운 학설이죠.
유대인을 뒤따르던 이집트 군인들은 다시 밀려온 해일에 휩쓸려 죽고 말았는데, 고대의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모두 신의 저주와 연관성을 지으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최대 번성기를 맞이한 투탕카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투탕카멘의 피라미드 묘를 도굴한 사람이 병들고 급사하거나 사고로 죽는 경우를 파라오의 저주라고들 했습니다.
이집트의 여왕 하트셉투트도 저주와 관련한 일화가 또 있습니다. 아마도 죽어서 투트모세 3세의 증오를 잊지 못하고 도굴꾼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라 저 나름대로 상상해 봅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저주 또한 투탕카멘의 저주처럼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묘
그의 묘를 도굴하여 운반하던 중 수많은 죽음과 저주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1910년 카이로에서 한 미국인이 관 뚜껑을 영국의 이집트 학자 더글라스 머리에게 팔았습니다. 거래가 끝난 후 그 미국인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도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머리라는 이집트 학자는 사흘후에 소총에서 탄환이 발사되어 그의 손을 찢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팔꿈치 아래까지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는 관을 영국으로 싣고 가던 배에서 두명의 일꾼이 갑자가 급사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머리는 그 관이 도착하자 마자 자신이 알고 지내던 어느 여인의 집에 맡겨 두었는데 며칠 후 그의 여자친구도 병에 걸렸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정도 상황이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계속되는 죽음과 사고들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저주에 대해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호사는 그 관의 주인인 머리에게 다시 가져갔으나 머리는 관을 바로 대영박물관에 보내버렸습니다. 당시 대영박물관은 이집트에서 온 수많은 국보급 보물과 유물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관장은 별볼일 없는 관이라 판단하여 사진만 촬영만 한 후 미국 박물관의 공룡 뼈와 맞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도 하기 전에 사진사와 박물관장이 갑작스레 죽고 말았습니다.
어찌되었건 관은 미국으로 보내기 위해 선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박물관의 담당자는 화물의 선적과 관련한 사항을 기록해 두었고, 그 배는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항에서 뉴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바로 타이타닉호였다고 합니다.
당시 타이타닉호의 사진
영화 타이타닉호의 한장면
아름다운 영화의 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