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가 말하는 유득공의 보물상자 이야기

무더운 여름이 깊이를 더해가는군요.

아침 일찍 이러나 책꽂이에 꽂힌 책을 가만 가만 넘기다가 좋은 글귀가 있어 소개합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아시는 이덕무의 [책만 읽는 바보]에 나오는 이덕무가 유득공을 보고 느낀 점입니다.
이덕무는 유득공이 항상 밝은 표정의 인물이라 칭찬합니다. 사는 모습도 털털하고 느슨한 삶이라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이덕무는 유득공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글은 유득공의 글상자에 대해 설명한 부분입니다.

그의 방은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반듯반듯하게 정돈된 붓과 벼루며, 내용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는 책들, 어디론가 훌쩍 다녀올 때마다 지니고 온 올망졸망한 기념품 같기도 하고 골동품 같기도 한 물건들. 그 모든 것에는 다 자리가 정해져 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 가운데 유득공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은 글 상자였다. 그는 늘 소매 속에 종이와 붓을 넣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색다른 것을 보면 글로 써 두었다. 책을 보다가도 기억해 두어야 할 내용이 나오면 꼼꼼히 기록했다. 이렇게 써 둔 종이들은 내용에 따라 다시 한 번 걸러지고 나누어져서 그의 글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버릇은 어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색색의 고운 조각 천을 바느질 상자에 모으셨듯이, 그는 아름답고 색다른 글귀조각들을 글 상자에 모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작고 어여쁜 글 상자는 여전히 그의 방 한쪽 구석에 단정히 놓여 있다.

그의 글 상자에는 다양한 글들이 담겨 있었다. 한창 시를 짓는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옛 중국의 시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 고려의 시들을 가려 뽑아 두었다. 다른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한창일 무렵에는 만주, 몽고, 중국이나 왜 같은 나라들은 물론 회회(지금의 위구르), 안남(베트남), 남장(라오스), 면전(미얀마), 들에 대한 기록까지 담아 두었다. 머리가 붉다 하여 홍모번(영국)이라 부르는 나라와 아란타(네덜란드)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한 번씩 뒤적일 때마다 그의 글 상자에서는 옛날과 지금,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와 벗들은 유득공의 글 상자를 진귀한 보물 상자라 불렀다.

무엇보다 그가 귀히 여겨 담아 두고자 한 것은 그때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역사, 조선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애써 찾은 기록은 중국 사람들의 눈으로 본 것들이 많았다. 그나마 충분하지도 않았다. 자기 나라 역사를 쓰고 난 다음, 간혹 한두 마디 언급한 정도여서 정확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천하의 중심인 중국에게 조선은 동이, 즉 동쪽의 오랑캐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들의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제대로 된 기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탓을 하자면, 제 나라 역사를 기록해 남기기에 소홀했던 이 땅의 선비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제 나라의 역사를 제 나라 민족이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데, 남의 나라에서 성의껏 써 줄 턱이 없지!"

잘 생긴 이마를 찌푸리며 유득공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에 관한 내용이 담긴 것이라면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모두 구해 읽고 글 상자에 담아 두었다.

내용물이 많아져서 상자가 넘친 데다 무겁기도 하여 종이와 천을 겹겹이 발라 만든 글 상자로는 감당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에는 고리버들로 만든 고리짝이, 다음에는 제법 튼튼한 나무로 만든 책궤가 글 상자 노릇을 하였다. 방 한쪽에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은 유득공의 방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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