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크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

로마의 위대한 영웅들을 손에 쥐락 펴락한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인 크레오 파트라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저 어렸을 적에 이모님들이 말씀하시길 동양에는 양귀비가 서양에는 크레오파트라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아름다운 여자를 일컬을 때는 이 두 여자를 비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에게는 크레오파트라가 더 이쁜 여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릴적 서양문화이 물밀듯이 밀려와 그러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서양여자들은 모두 이쁘다는 사대주의가 어린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로마의 황제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농락한 여성.
역사는 밤에 씌여진다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저도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사극을 보면 일부 납득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역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시대는 현대나 과거나 항상 있었으니까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하면서 여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크레오파트라가 악렉산더의 후손이라고 알 고 있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과거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유입시켰고, 이집트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융합이 알렉산리아라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 점령 한 이집트는 그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나라로 갈라졌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세워진 왕조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헬레니즘 시대에 약 5백년간 이집트를 지배한 왕조이기도 합니다. 크레오 파트라는 그 왕조 최후의 여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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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남동생과 정권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품페이우스를 뒤쫒던 가이아 율리우스 시저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절대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로마와 같은 강력한 나라의 집정관이 이집트의 내정을 간섭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저 역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몇주간의 시간을 밀월 여행을 보내기도 하였다는 것이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시저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명민하며 조심스럽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소소한 일로 자신의 기회나 주변 상황을 밀치는 성격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어찌된 것인지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 정치적 일들은 모두 젖혀 놓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의 짧은 역사적 상상으로 풀이한다면...

당시 로마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빈곤과 병으로 시민들의 삶은 다른 어느 나라 보다 낙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의 화려한 건축물은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건축물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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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의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정치적인 일과 공화정을 고수하려는 원로원의 반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이를 방어하려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그리 재미있는 일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때마침 이집트에 도착한 시저가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았을 것은 당연할 겁니다. 알렉산더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이 거대한 쓸모없는 돌덩이를 보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비견할때 오히려 외소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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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집트는 동방의 상인들의 출입이 잦은 대다 화려한 그들의 상류층 생활을 보면서 로마의 지저분한 뒷골목과 정치를 생각을 하면 조금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거기다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까지 함께 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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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막사에서의 생활을 그린 갈리아 전기를 읽어보면 시저의 그동안 전쟁속에서의 군인들과 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군생활이 찬란한 이집트 문화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국적인 귀족생활에 현명한 시저를 잠시 눌러앉게 만든 것이라 봅니다. 한편 그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인생에 한편의 낭만을 즐기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중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앞으로 지루하게 끌고가야할 로마 원로원과의 논쟁에 앞서 향후 로마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설정하는 것이 맞으리라 봅니다.

로마의 뒷골목에서는 이런 시저를 보고 이러쿵 저러쿵 험담들이 난무했습니다.
거기다 키케로는 "나는 그 여왕을 증오한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시저처럼 명민한 사람이 주위에 이런 이야기가 들릴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반 시저 세력이 로마에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방관하고만 있었던 걸까요?

그러나 시저가 돌아왔을때는 모두들 잠잠했으며 절대 권력을 가진 시저앞에서 누구 하나 그의 이집트 여행을 들먹인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후에 이러한 절대권력에 대한 안위가 시저의 죽음을 부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크레오파트라와 시저와의 관계란 세상의 역사를 짧은 순간 뒤바꿔 놓았습니다. 역사란 이렇듯 잠시 한눈 판사이에 새로운 미래가 다시 씌어지게 되는가 봅니다. 이후 안토니우스 또한 크레오파트라와의 관계로 인하여 목숨을 건 전쟁을 단행하게 됩니다.

시저라는 인물에 대한 후대 역사의 평가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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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이름이 제후라는 뜻으로 씌이기 시작하였고, 왕관을 쓴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시저라는 이름을 썼는가 하면 이후 황제들이 모두 시저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근대에는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짜르 등 국가의 원수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할 말이 만은데요...
시저의 성장과정도 남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는 아무도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영웅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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