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자 풍경사진 155

['혼불' 첫째 권과 나머지 아홉 권]

조립식 옷걸이를 설치하려고, 작은 방에 쌓여있는 책을 정리해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몇 달 전, 이사를 하면서 계획없이 짐을 쌓아놓았는데 그 뒤로 지금껏 방치해둔 터였다. 거기서 책꽂이에 뒤집혀 꽃혀 있는 최명희의 혼불 열권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책들을 보면, 혼불 첫째 권은 새것과 다름없는데, 나머지 아홉 권은 많이 낡았다. 겉표지도 해지고 옆에는 도서대여점 도장도 찍혀있다.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연유는 이렇다.

아는 선배가 비디오대여점을 하고 있었는데, 옆집이 도서대여점이었다. IMF가 터지고 얼마 안 되어서 도서대여점은 문을 닫게 되었고, 옆집이라는 이유로 선배가 그 가게를 인수했다. 도서대여점의 책을 옮기는 날에 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잠시 쉴 때 보니까 혼불 중에서 1권이 없고 아홉 권만 있는 것이다.

“1권은 어디 갔을까요?”
“몰라. 인수받을 때부터 없었어. 하나 사서 맞춰놔야지..”

그래서 내가 그랬다. ‘선배. 내가 1권 사올테니까 여기 두고 영업하다가 나중에 가게 문 닫게 되면 10권 모두 나 줘요.’

시간이 더 지나서, 선배는 비디오&도서 대여점의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돼서. 문 닫는 날, 나는 또 짐 옮기고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러 갔다. 그리고 혼불 10권을 얻어왔다. 그냥 보내기 그랬는지, 선배는 다른 책들도 몇 권 가져가라고, 비디오랑 DVD도 갖고 싶은 거 가져가라고 그랬다. 난 혼불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매장에 있던 나무 의자 하나를 얻어왔다. 그 의자도 내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거였다. 비록 페인트가 벗겨지고 낡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조금 쓰다가 망가지면 부담없이 버릴 생각이었다. 그 나무 의자는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 있는데, 가끔 베란다에서 그 의자에 앉아 책을 본다.

80년대 중반에 모 심야 라디오에서, 개그맨 전유성씨가 일주일에 한번 고정게스트로 출연해서 신변잡기를 진솔하게 얘기하고 웃음과 여유를 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가 젊었을 때, 아는 형이 카페를 열어서 개업하는 날 찾아갔더니, 카페 안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더란다. 그는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나중에 가게 문 닫으면, 저 그림 제가 가져갈게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게 개업하는 날 할 소리냐’는 듯이 뭐라고 눈치를 주었는데 개의치 않았단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카페가 망했고 전유성씨는 가게에 찾아가서 그림을 가져왔다는 얘기다.

그는 그 일화 다음에 또 다른 일화를 하나 덧붙였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이랬다. ‘사람은 때론 솔직해야한다. 솔직하니까 그림도 생기고 그런거 아니겠나. 솔직해야 여러 사람이 편하다.’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아마도 ‘말은 때를 가려서 해야 한다.’ 정도를 생각했을 텐데, 그의 결론은 아주 의외였고, 그래서 더 웃음이 나고, 방송이 재미있었다.

내가 비디오&도서 대여점에서 혼불을 받아오던 날, 그 방송 내용이 생각났다. 혹시 내가 옆 매장을 인수하고 사업을 확장하는 날에 ‘문 닫으면’ 이라고 분위기를 망쳐놓은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물론, 나 때문에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도서대여점을 인수 받을 때부터, 장사가 잘 안되니까 오래지 않아 정리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주인이 그랬으니까.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되니까 베란다에 앉아 책보기 아주 좋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적당히 햇살이 들어오고, 주변 경치도 좋다. 그 때 가져온 나무 의자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본다. 혼불은 책이 오래되었지만, 정말 좋은 책이다. 자주 읽게 되는 것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어서 더 그런가보다. 혼불 첫째 권과 나머지 아홉 권...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 그렇게 책꽂이에 꽂혀있다.

- [500자 풍경사진 155]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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