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고백
(사기, 사마천/ 김진연 역, 서해문집에서 발췌함)
사마천의 고백 - 任安에게 보내는 편지
일개 史官에 지나지 않는 사마천이 편지 올립니다.
지난번에 보내 주신 글에 진심으로 남과 사귀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라는 그 말씀을 하나하나 깊이 명심하며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비록 제가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얘기할 상대도 없고 항상 혼자서 우울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입니다.
鐘子期가 죽은 다음에는 伯牙가 두 번 다시 七絃琴을 뜯은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 주는 자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반쪽이 되고 만 저 같은 자가 설사 드높은 재주를 가지고 許由나 백이와 같은 덕행을 쌓았다 하더라도 영예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제가 회답을 곧 드려야 했으나 동방 巡行에 따라가랴 보잘것없는 제 일도 돌보랴, 찾아 뵐 겨를도 없이 바쁘게 쫓겨 살다가 이렇게 늦어진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니 당신께서 뜻밖의 不運을 당한 지 수 개월이 지나 이제 12월도 목전에 임박했습니다. 그러니 언제 당신께 예기치 못할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금, 저의 울적한 생각을 말씀드리지 못한다면 커다란 한이 될 것입니다.
소식드리지 못했던 점을 사과드리며 아울러 저의 어리석은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지혜란 수양의 깊이에 의해 알 수 있고, 仁은 동정심의 유무에 의해 알 수 있으며, 義는 주고받음의 정당성에 의해 나타납니다. 또한 용기란 염치를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으며, 行이란 이름을 어떻게 떨치느냐에 의해 평가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덕을 갖춰야만 군자로 처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비에게 가장 불행한 경우는 이익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일이며, 보다 큰 고통이란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 가는 추한 행동은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며, 치욕으로서 으뜸 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입니다.
궁형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관습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입니다. 위나라 영공은 환관 옹거를 자기 수레에 태웠기 때문에 공자는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상앙은 환관인 경감의 손을 빌어 일하게 되었기 때문에 趙良은 그의 장래를 한심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환관 조동은 文帝의 수레에 함게 탔기 때문에 원앙이 크게 노했던 것입니다. 환관과 관계되는 일이 발생하면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평민조차도 얼굴을 찌푸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 하여도 나 같은 자가 어찌 천하의 인재를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저도 下大夫의 일원으로 御前會議에 배석한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사물을 바르게 볼 줄 몰랐습니다. 지금 非人間으로 전락한 제가 우스꽁스럽게도 휘젓고 다니면서 시비를 가리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조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며 유능한 선비들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 나 같은 자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세상사처럼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 사람들의 讚辭 한 마디 들어 보지 못한 채 아버님 덕분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궁중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머리에 얹게 되면 하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매사에 예상할 수 없는 잘못이 생기는 법입니다. 李陵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릉과 저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동료였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이나 성격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술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나눌 만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신념이 있는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버이에게는 효를, 친구에게는 신의를 다했으며, 금전 관계는 깨끗하였고,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인재였습니다. 저는 그가 나라의 큰 선비와 같은 기품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확신했습니다.
대체로 신하된 자로서 만 번 죽는다 해도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먼저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 하는 것이란 예나 지금이나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했던 일 중의 하나가 좋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자, 자신의 몸을 사리고 처자식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던 신하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그의 잘못을 비방하고 조작했기 때문에 저는 참으로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이릉 장군은 끝내 패전하기는 했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휘하에 있던 5첩 명도 안되는 병사를 이끌고 흉노족의 본거지 깊숙이 쳐들어가, 목숨을 걸고 수만의 적군과 대결하면서 10여 일에 걸쳐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흉노족은 사상자를 처리할 여유도 없이 총동원령을 내려 포위공격을 했습니다. 이릉의 군대는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천 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드디어 화살은
끊기고 구원군조차 오지 않는 상태에서 산더미 같은 사상자를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릉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모두 용감히 일어서서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키며 맨주먹을 휘두르면서 칼날에 맞서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릉이 패배하기 전에 전령이 그의 분투 소식을 알리자 朝廷百官들이 축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패전 소식이 들어오매 폐하께서는 입맛을 잃어 음식을 끊고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셨고, 대신들 또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폐하의 괴로운 심정을 알아차린 저는 천한 제 지위도 잊은 채 폐하를 위로해 드리고자 아뢰었습니다.
“이릉은 항상 부하들과 苦樂을 같이 했고, 그리하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신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옛 명장이라도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은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가 포로의 몸이 된 것은 차후 조국에 다시 봉사하겠다는 충정에서였을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흉노의 대군을 격파한 공적은 천하에 알려 표창할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이러한 저의 충정을 이해하시지 못한 채, 오히려 제가 이릉 장군을 두둔하여 총사령관이던 이광리 장군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오해하시고 저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벌금형으로 대신할 만한 재산도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한마디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릉은 목숨을 건져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가문을 더럽혔고, 저는 蠶室에 내던져진 채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정말 서럽고 서러운 일입니다. 어찌 筆舌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封侯의 영예나 특별한 포상을 받은 적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太史란 직업은 무당이나 점쟁이에 가깝고, 이른바 폐하의 우롱을 받는 樂工이나 배우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할 뿐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멸하는 대상입니다.
이러한 제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 소중에서 터럭하나(九牛一毛)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微物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충성을 바치고 뛰어난 계책을 바쳐 나라에 보탬이 된 적도 없었고, 또한 어질고 현명한 선비들을 추천하거나 등용시키지도 못했으며, 아울러 전쟁에 나아가 성을 뺐거나 적장의 목을 벤 공로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공을 세워 一家親戚이나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푼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던 처지였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죽음이 태산보다 큰가, 아니면 터럭만도 못한가는 그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古書에 이르기를 ‘형벌은 사대부에까지 이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 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 협박당하고 고통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져 채찍을 맞고 감옥에 처박히면, 獄吏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때 오히려 자기가 氣槪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무릇 영웅호걸들도 사직당국에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린 것에 있어서는 저와 다름이 없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용기 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士大夫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人之常情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早失父母하고 형제조차 없이 외롭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 제가 새삼스럽게 부모와 처자 때문에 살고자 했다고는 당신께서도 생각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저도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去就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릇만 하고 있겠습니까? 천한 노예와 하녀조차도 자결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려 했으면 언제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까닭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宿願이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후세에 文章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부귀하게 살았지만 그 이름이 흔적조차 사라진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오직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탁월한 인물만이 후세에 그 명성을 드날리는 법입니다. 주나라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周易]을 발전시켰고, 공자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 또한 추방된 후에 [離騷]를 지었습니다. 左丘明은 봉사가 된 후 [國語]를 저술했고, 손빈은 다리를 잘리고 병법을 편찬했으며, 여불위는 촉나라에 유배되어 [呂氏春秋]를 세상에 남겼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세난 說難]과 [孤憤]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인간이란 가슴에 맺힌 한을 토로할 수 없는 경우에, 옛날 일들을 엮고 미래에 희망을 갖기 위해 名著를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좌구명이나 손빈은 시력을 잃거나 다리가 잘려서 이미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붓에 모든 힘을 기울여 자신들의 맺힌 한을 문장으로 남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제 분수를 모르고 서투른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고자 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기록들을 모아 그 사실 여부를 가려내고 체계를 세워 흥망성쇠의 이치를 정리하여 黃帝의 上古時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표 表]10편, [본기 本紀]12편, [서 書]8편, [세가 世家]30편, [열전 列傳]70편, 총130편으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天道와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고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달하여 마침내 하나의 일가견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의 재앙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형을 받았으면서도 태연스럽게 살아 남으려 했던 것은 이 저술이 완성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저술이 완성되어 名山에 보관되고 각지의 선비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된다면, 저의 치욕도 충분히 씻겨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사 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런 내용을 당신 같은 분께는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지만 속된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의 몸에 덧없는 세상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고 또 너무도 말이 많습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하는 바람에 이런 화를 당해 고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욕되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산소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는 더욱 쌓일 뿐입니다. 하루에도 아홉 번 腸이 뒤집히며, 집안에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후궁에서 봉사하는 환관의 처지로, 산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세속과 영합하면서 그날그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게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가르쳐 주신 점, 진실로 고맙게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스스로를 꾸미고 애서 본들 세상에 보탬이 될 리 없으며 오히려 불신만 받은 채 이미 받은 치욕만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옳고 그름은 이제 후세에 맡기고자 합니다. 충분한 답변을 못 해 드린 점, 다시금 사죄드립니다.
삼가 再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