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들으려는 이유
* 2009년 1월 9일부터 다섯 차례 예정된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들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정리했습니다. 너그럽게 읽으시고 잘못된 점이나 지적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들으려는 이유:
2009년 1월 9일부터 다섯 차례 예정된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들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오고 가고 네 시간 넘게 차를 타야 하고, 끝나면 심야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접수 및 강의 시간 문의를 위한 통화에서 손기태님(강사)은 <에티카>를 잘 이해하기 위해 참고 자료들을 읽으면 좋다는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그 때문만은 아니고 지금 참여하고 있는 새 모임과도 관련된 몇 가지 알고 싶은 것들을 스베덴보리 책들로 풀기 위해 책 몇권을 사려 하고 있다. 새 모임이란 내가 새 교회로부터 빌려와 쓰는 용어이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에서 몇 개의 영적 시대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그 시대들을 교회들이라 불렀다. 이때 교회들이란 건물도 아니고 인간의 모임도 아니고 신과 인간 사이의 교제에서의 발전 단계를 의미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새 모임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꼭 실천해야 할 것들로 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버려야 할 것들로 보는 모임이다. 물론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도 어떤 목적에 따른 것이냐에 따라 너무도 큰 차이를 낳는다. 자기 이익을 위한 선행은 소용이 없고 오직 그 자체를 위해 하는 사랑이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주장한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명예, 부, 쾌락이라는 세 가지 세속적 가치들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추구될 때 삶에 해악을 끼치지만 다른 일을 위한 수단으로 추구한다면 삶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의 쾌락 추구도 좋은 것이라 보았다. 목적을 강조하는 새 모임과 수단을 강조하는 스피노자는 얼핏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 모임이 주장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선적(善的) 가치이고 스피노자가 거론한 것은 세속적(世俗的) 가치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목적과 수단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의 문제냐에 따라 다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은 신체를 지녔고 이는 성경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새 모임의 12월 21일 주보에는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은 사람(Man)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으로 계시며 몸(교회)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해설이 실렸다. “신은 신체를 지녔다”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하나님은 사람(Man)이시며 몸으로 계시며 몸(교회)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을 같은 의미로 보기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대응(correspondence)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두 담론을 낳은 맥락을 비교해 보지 못하고 가하는 해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응이란 성경 말씀이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 영적인 뜻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내 해석이 물론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적 해석을 버리고 두 담론의 비교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만 싶다. 스피노자는 맥락에 따라 범신론자, 무신론자, 그리고 신에 취한 사람(노발리스의 말) 등으로 불리는 철학자이다. 그는 신의 완전성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목적론을 비판했다. 행위자가 신(神)일망정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어떤 결여를 메우기 위한 행동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신은 완전하다는 전제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창조에 관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세상은 창조주와 피조물로 나뉠 것이고 신은 피조물이 될 수 없기에 즉 피조물이 될 수 없는 제한을 가진 존재가 되기에 이는 신은 완전하다는 전제에 어긋나며 이때 신을 완전하게 하려면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지 말고 세상 속에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이 피조물이 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분명 신은 육신(肉身)을 입으시고 우리의 성정(性情)을 취하셨다. 이에 관련해서는 어떤 목적을 가진 행위인가를 다시 한번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스피노자는 당대의 과학에 정통했지만 윤리와 종교적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이 말을 들으니 또 어쩔 수 없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이성비판>은 뉴턴의 자연과학과 스베덴보리의 영혼론이 반영된 책이라는 말 말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처럼 신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창조주로서의 신을 버리고 신은 세계 안에 있다는 범신론적 관점을 취한다면 세상의 기원에 대해 해줄 말은 아무 것도 없다. 스피노자가 과학이 아닌 윤리와 종교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것은 과학이 세상의 기원에 대해 아무 답도 해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은 ‘어떻게’는 설명해도 ‘왜’는 설명할 수 없다. 외부 원인이 아닌 자기 원인에 의해 스스로 있는 존재를 실체(Substance)로 본 스피노자는 묘하게도 그 존재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그를 범신론적 존재로 봄으로써 창조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 결과 신을 창조주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했다.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은 대자연과 동일한 오직 하나의 실체 곧 ‘신 또는 자연’만이 실재한다는 일원론에 있는데 그가 말하는 신을 자연 그대로의 우주의 질서 잡힌 체계를 지칭하는 암호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소 솔직하지 못한 무신론자로 보일 수도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자들이 신(神)이라는 유일 실체의 양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의 본질인 힘이 강도(强度)적 크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힘이 강도적 크기라는 말은 30 미터라는 길이는 10 미터의 길이를 가진 막대 세 개가 연결되어 이루어지지만 30도씨라는 물 온도는 10도씨의 물 세 그릇이 합쳐진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힘의 다양한 강도는 각각 고유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열과 온도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열을 ‘온도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실체로, 온도를 열의 뜨겁고 차가운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볼 수 있지만 열은 어떤 물체를 이루는 전체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의 총량이고 온도는 그 분자들의 평균 에너지를 나타내는 양으로 보는 것이 더 과학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온도는 수영장 물의 온도보다 높지만 총 에너지는 훨씬 작다. 즉 90도씨짜리 커피 한 잔을 30도씨짜리 수영장에 붓는다고 해서 수영장 물의 온도가 갑자기 60도씨로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균이란 말을 들으니 자연은 차이를 싫어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자연은 차이를 싫어한다지만 사람도 그 자연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인간을 비롯한 개별자들은 고유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과 자연은 차이를 싫어한다는 말은 함께 거론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스피노자 독해로부터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구해낸(?) 들뢰즈를 통해 대표적으로 드러나듯 스피노자는 영감의 원천으로 보인다. <에티카> 강의를 들은 뒤 꾸준히 읽고 고민해야 스피노자 사상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 사상의 전모가 어떻든 내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은 신앙 모임이고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주장한 철학자일 뿐이다. 버트란드 러셀은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전체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그의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토대가 모두 부정되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편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만물은 영원한 상(相) 아래에, 즉 신과의 필연적 관계에서 볼 때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서의 희열이 생긴다’는 말을 했다. 철학자 김영민교수는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자신의 과거는 물론 내생까지도 훤하게 꿰뚫게 되었노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은 항상 정념에 흔들려 살기 때문에 스피노자처럼 사유하고 있으며, 그의 <에티카>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실천적인 책으로 꼽았다. <에티카>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실천적인 책이라는 고진의 말이 내게도 용기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에티카>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고사하고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지도 못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서의 희열을 논한 스피노자를 참고로 삼기 위해 <에티카>를 읽으려 하며, 또 강의를 들으러 가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