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제 도서관에서 박이문선생의 <현상학과 분석철학>, 박승억교수의 <후설 & 하이데거>를 빌려 놓았다. 쉬운 책으로 보여 골랐지만 내 의도대로 쉽게 읽힐지 장담할 수는 없다. 철학은 늘 내 그런 섣부른 기대를 저버리는 마력이 있는 분야이다. 나에게는 분명 철학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 갈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철학아카데미나 수유 공간 너머 등의 강좌를 듣든지 나 혼자 어려운 책들과 씨름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한 10여년 전부터 이정우교수의 <담론의 공간>, <가로지르기>, <인간의 얼굴>, <세계의 모든 얼굴> 등의 책으로 철학에 나름으로 재미를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이정우교수의 책은 <탐독耽讀>이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쉽게 읽어낸 저자의 마지막 책인 셈이다. 꽤 부지런히 좋은 철학 책을 내고 있는 그 분은 언젠가 본격적인 철학 책을 써야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 말 이후 나온 책들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천 하나의 고원> 등이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반 정도 읽다가 놓아 둔 상태이고 <천 하나의 고원>은 난해함 때문에 쉽게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틈나는 대로 들춰보고 있는 상태이다.

비유컨대 <담론의 공간>, <가로지르기>, <인간의 얼굴>, <세계의 모든 얼굴> 등의 책들이 고전 음악이라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천 하나의 고원> 등은 메시앙이나 슈톡하우젠, 리게티 등의 난해한 현대 음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기 이정우교수의 저작들과 후기 이정우교수의 저작들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전기, 후기 등의 말은 편의상 내가 붙인 이름이다.) 언젠가 이정우교수는 철학은 차근차근 기초부터 탑을 쌓듯 공부해야 하는 분야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나는 실감한다. 최근 나는 조광제교수의 <의식의 85 가지 얼굴>이란 책을 읽고 있다. 난해한 현상학 개념들을 익히느라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대형 서점의 철학 서가에는 저서들도 많고 철학 아카데미나 수유 공간 너머 등에는 개설 강좌들도 참 많다. 하지만 강좌의 수준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쉽게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내가 자주 가는 블로그 중에 이글루스의 딜레탕트란 분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다. 50 중반의 분인데 최근 나는 이 분이 지난 2003년부터 철학아카데미, 강유원, 디지털아카데미 등에서 수강한 목록을 게시한 것을 보았다. 참 부지런하고 긴 호흡을 가진 노력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분 역시 철학을 전공한 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분을 보며 나라고 못할 것이 있겠는가, 란 생각을 하고 있다.

북스토리라는 좋은 사이트를 안 지 두 달 정도 되었다. 책을 읽고 글을 써 올리며 나는 때로 철학자 김영민교수의 독백 같은 글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날마다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요절한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를 흉내내는 것일까?...오직, 이제 실기(實氣)를 얻어 실심(實心)으로 실지(實地)를 걷는 일만 남았을 것이니...” 란 글을 내 처지에 맞춰 ’그러나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일까?‘로 고쳐 읽곤 한다.

북스토리 회원들 중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분들이 계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을 꿈꾸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닌 나에게 실기(實氣)를 얻어 실심(實心)으로 실지(實地)를 걷는 일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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