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아픈 날 오늘도 여일하게, 經을 읽는다는 시를 읽으며...
사유의 대가들은 긴장 없이 읽고 사유하고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긴장은 부지불식간에 목 근육을 경직시켜 흔적을 남기고 피로를 누적시킨다. 가끔 참 어려운 책을 집중해서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이런 증세는 며칠 간다. 며칠이라는 시간보다 그렇게 긴장에 노출된 때 쉬운 책이어도 읽으려 하자마자 바로 머리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더 우려스럽다. 시간을 잘 나누어 쓰고 잠을 충분히 자고 소용 없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이런 증세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자경 교수의 ‘화두’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속이 체한 듯 온몸이 꽉 막혔다가 어느 순간 그 답답함이 일시에 사라진 것을 화두 타파이자 통과.”라 말하는.. 나도 이런 답답함과 정체가 풀렸으면 좋겠다. 장휘옥 법사의 책 제목처럼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생각하고 살고 싶다. 한자경 교수의 ‘화두’의 내용과 통하는 부분이 장휘옥 법사의 책에도 나온다. “유식(唯識)은 우리가 수행에 매진하면 어느 순간 번쩍하는 깨달음이 있어 참다운 지혜가 발현되며 그때부터 자신이 쌓아온 나쁜 영향력들이 없어지기 시작한다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수행을 하겠는가. 나는 수행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정현종 시인의 ‘술잔 앞에서’에 나오는 ”숨 쉬는 법을 가르치는 술잔“이란 구절이 머리를 맴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접하며 세상에는 다 법도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는 시인처럼 그렇게 며칠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고 싶다. 이 시인의 시 가운데 ‘여일 한의원‘이 있다. ”머리에 침을 꽂고 누워 있다 밖으로 나오니/ 머리 어딘가에서/ 가늘게 피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명치끝이 몇 달째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다// 머리와 가슴과 배와 다리에 침을 맞고 누워 있는/ 그대여/ 몸이 너의 경전이다/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經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생을 다해 읽어내야 한다// 손상기의 그림을 보러갔다가 다리가 찌릿찌릿하다/ 고 쓴/ 외면하고 싶은 글을 또 만나게 되었다/ 죽은 그가 나를 때려눕힌다/ 나는 아직 삶의 아무것도 불사르지 못했다// 命의 부림을 당하는 자는/ 운명을 걸어야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법,/ 너는 얼마든지 더 고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도 여일하게, 經을 읽는다“ 지금의 내 심경을 대신 말해주는 시이다. 차이가 있다면 손상기 화백의 그림을 보며 시인은 고통을 느끼지만 나는 그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는다는 점이다. 내가 인정이 없어서는 아니다. 다만 ”나는 아직 삶의 아무것도 불사르지 못했다“는 구절, ”오늘도 여일하게, 經을 읽는다“는 구절로부터 힘을 얻을 뿐이다. 권현형 시인의 ‘해석되지 않는다’란 시의 첫 구절(”늙은 독학자는/ 끝을 본 사람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그래서 빙그레 웃는다.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를 바라는 권현형 시인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