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과 독창성, 상상력과 지식의 도약...

정찬주 작가의 ‘천강에 비친 달’을 읽고 있다. 학승(學僧)인 신미 대사란 분이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작가는 이불재(耳佛齋)에서 글을 쓰고 계시다. 법정 스님께서 이 분을 재가 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의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의 묘비에 쓰인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정결하다는 의미의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연상하게 하는 멋진 법명이다. 耳佛이란 솔바람에 귀를 씻어 성불(成佛)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라고 한다.


최근 현진 스님의 ‘스님의 일기장’에서 읽은 바로는 불교에서는 쓰는 말 중 이불(離佛)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수행하지 않고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면 부처가 떠난다는 의미라고 한다. 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이란 뜻의 이불(泥佛)도 있고 법신(法身)을 뜻하는 이불(理佛)도 있다. 나는 이불(泥佛)이 가장 마음에 든다. 투박한 뚝심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작년에 읽은 책들 중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인상적이고 문제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철저한 사상가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독창성과 뚝심이 필요함을 알게 한 책이다. 은유(隱喩)와 환유(換喩)의 차이를 밝힌 이 책에서 저자는 은유는 무한 대치가 가능하고 파편적이며 선택적이고 의미론적이고 추상적이고 해석적이고 관념적인 반면 환유는 표상적 의미를 적극 욕망하는 세계의 한 국면이고 극사실주의적이고 감각적이고 표상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저자는 임제선사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의미의 죽이기(殺佛殺祖)는 은유적 사고 구조와 매우 유사하고,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는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임의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조차 꺼리는 사유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나(주체) 중심의 관점을 버리고 은유적 언어 대신 환유적 언어체계를 중심부에 놓는 변화를 지향할 것을 주문한다.


김병훈 님의 책 중 ‘해커 붓다’(2014년 5월 출간)가 있다. 해커 붓다란 우주의 존재법칙을 깨닫고 사라진 부처라는 의미이다.(저자에 의하면 해탈이 바로 해킹이다.) 박용숙 님의 ‘샤먼문명’(2015년 4월 출간)은 석가모니를 샤먼으로 정의한 책이다.(저자는 샤먼을 어떤 종교보다도 오래된 신앙이자 문화, 사회적 가치이자 질서라 정의한다.) 샤머니즘은 불교, 기독교 등의 원문명(原文明)이며 신비로우면서 과학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런 책을 보면 레비스트로스가 토템을 새롭게 정의한 것이 생각난다. 토테미즘은 미개 사회에서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신성시함으로써 형성되는 종교 및 사회 체제라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인류학자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환상, 공론(空論), 단순하고 무의식적인 지적 작용의 결과로 정의했다. 토템은 변별적 성격과 자의적 성격을 동시에 갖춘 기호체계이다.(물론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레비스토로스는 토테미즘은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에 가해진 비판의 핵심은 권력은 바깥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정우 교수는 ”레비스트로스는 현상학의 내면성을 비판하고 바깥의 사유를 제시했지만 그 바깥(현상학의 바깥)의 바깥을 보지는 못했던 것일까?”란 말을 한다.(‘인간의 얼굴’ 248 페이지) 이 책들을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상상력과 지식의 도약’(2015년 4월 출간)이란 책이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력으로 도약(跳躍)해야 한다. 거듭 한계를 넓혀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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