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이야기, 유령 이야기...

시간이 꽤 지났지만 한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 이야기를 해야겠다. 크게 공감하며 읽은 그 글에 의하면 소설가는 기억력이 좋은 유형,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유형, 기억력도 좋고 상상력도 좋은 유형 등으로 나뉜다. 대체로 ‘기억력이 좋은 유형‘이나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공상가 유형’이 많고 ‘기억력도 좋고 상상력도 좋은 사람’은 드물 수 밖에 없다.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공상가’는 위험하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소설 쓰지 말라" 는 식의 소설 폄하의 말이 생겨난다. 사람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迷惑)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공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미혹되는 경우는 당연히 이 경우에 한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중 두 가지를 고르라면 글을 읽되 쓰지 않는 경우, 새로이 책을 읽지는 않으며 부실한 콘텐츠이나마 희미해지고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옛 독서물에 의거해 여전히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하는 경우 등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샤를 단치가 ‘왜 책을 읽는가’에서 독서는 결국 글쓰기로 나아간다고 말했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빈약하고 불확실한 기억에 매달려 말을 하는 경우는 흔하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지만 내가기억력은 좋지만 상상력은 좋지 않은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소설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백상현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을 앞에 두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유령이 무슨 의미일까 이리 저리 궁리했지만 결국 예측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물론 책을 읽으면 금세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지만 두뇌의 원활함으로 표현될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 대문에 초라한 기분에 빠질 만하다. 이한 변호사의 ‘이것이 공부다’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다. 공부는 결국 생각 굴리기라는 글이다.






효율적인 의미의 굴리기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의문을 발전적으로 설정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지금은 답이 불만족스러워도 더 나은 답이 있을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관적일 경우 사고를 멈추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가마타 히로키가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다. 이는 연구할 것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도움이 되는 글이다.






어떻든 나는 외계인에게 잡혀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구상하고인지도 모르겠다.) 있다는 윤이형 소설가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쓰라면 참 막막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괴담들의 밤‘ 연재를 앞 두고 기대 글을 댓글로 받는다는 김휘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장편 소설 ’해마 도시‘에 이어 얼마 전 ’눈보라 구슬‘이라는 소설집을 냈다.






’해마 도시‘를 읽었는데 (읽는 사람이)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과학책을 읽다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기본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슬프거나 고통스런 기억을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지우는 사람들, 행복한 사람의 기억을 사서 이식받는 사람들, 인지 능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두뇌 시술을 받는 사람들이 나온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과 언어, 그리고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을 강조했다. 박지영 평론가는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욕망의 꼬리는 길다‘ 참고) 나의 이야기는 결국 문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자유 연상은 특정 주제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연상의 고리를 따라 생각들을 뻗어나가는 독특한 사고 작용이다. 여기서 분석가는 환자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을 분석, 치료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최면 요법 대신 자유연상을 도입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수다에 가까운 말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유로움 속에서 의미 있는 내용들이 건져올려진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백상현의 글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접한 부분은 저자가 자신이 말한 유령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느꼈던 오싹함의 실체로 풀이한 대목이다. 당시 그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는데 중요한 것은 후에 라캉을 좀 더 자세히 읽고 그날의 두려움이 응시(gaze)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어떤 경계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백상현에 의하면 유령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현상들의 정상성의 효과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나타나는 또는 기존 지식 체계의 균열점으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지식 체계이다. 정상성의 효과들이란 세계가 지닌 환영(幻影)적 속성을 은폐하는 것들을 뜻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논의가 인문학이라는 장(場)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는 유령의 의미가 여러 맥락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분리해 생각하는 랑시에르에 의하면 정치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사람들, 자신의 터전에서 내쫓긴 사람들이 평등에 근거해 자신들의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몫 없는 자의 몫이 제도화됨으로써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발생하는 ’정치’에서 몫 없는 자,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유령이라는 점이다. 고봉준 평론가는 ‘유령들’에서 현 시대를 유령의 시대로 규정하며 우리의 삶이 유령적 삶이 되고 도처에서 통치성의 유령들이 양산되고 있으며 자신이 “유령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고 말한다. 고봉준은 유령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유령이 기존 지식 체계의 균열점으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지식 체계를 의미하는 백상현의 맥락과 비교해 보아도 타당하다. 백상현의 맥락에서 유령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량을 가졌다. 번역, 출간된 지 8년이 된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오늘 읽었다. 이 책에는 여러 내용이 인상적이지만 유령 역시 그렇게 나온다. 창조성의 원천(源泉)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래 상상력을 유령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상상력을 유령이라 부르면 이상할까?’하는 의구심이 자연스럽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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