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우주 강의' 읽기를 앞에 두고...
힉스 입자에 대해 알기 위해 검색을 한 끝에 몇 권의 책을 찾아냈다. 리언 레더먼과 크리스토퍼 힐의 ‘힉스 입자 그리고 그 너머’, 김동희의 ‘바벨탑의 힉스 사냥꾼’, 아오노 유리의 ‘코스모스 시크릿’ 등이다. 리온 레더먼은 뮤온 뉴트리노와 b(bottom) 쿼크를 발견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 크리스토퍼 힐은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과 의장이다. 그런데 결국 구입한 책은 일본인 저자 다다 쇼의 ‘유쾌한 우주 강의’이다. 이 책은 힉스에 초점을 둔 책이 아니지만 힉스(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를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해냈다고 한다. 힉스 보손 또는 힉스 입자는 다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질량을 있게 하는) 입자로 17개의 기본 입자 가운데 하나이다. 보손(boson)은 보스 - 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입자로 스핀이 0 또는 정수인 입자이다. 보손과 함께 페르미온이 있는데 이는 스핀이 반정수이거나 복합적인 입자이다. 페르미온은 파울리의 배타 원리(Pauli exclusion principle)를 따른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는 전자계에서 2개 이상의 전자가 동일한 양자 상태를 지니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페르미온에 모든 쿼크와 렙톤들이 속한다. 물질의 기본 입자 17개는 쿼크 여섯(u, d, t, b, c, s) + 렙톤 여섯(전자, 전자 뉴트리노, 타우, 타우 뉴트리노, 뮤온, 뮤온 뉴트리노) + 보손 넷(글루온gluon, photon, w 보손, z 보손) + 힉스 등이다. 글루온은 쿼크의 강한 상호 작용을 매개하는 입자이다.(렙톤은 스핀이 半: 1/2인 정수 half - integer인 입자이다. 렙톤은 본질적인intrinsic 속성을 지닌다. 전하, 스핀, 질량이 그것이다.) 물론 다음 책은 ‘힉스 입자 그리고 그 너머’가 될 것이다.(글루온, 포톤, w 보손, z 보손은 게이지 보손이고 힉스 보손은 스칼라 보손이다.) * 이 무미건조한 글을 올리는 이유는 과학 책 전문 번역가 김명남씨의 “과학책 정말 안 팔린다.”(2015년 3월 22일 한국일보)는 말에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번역가를 네 종류로 나눈 김명남 씨는 자신은 텍스트에 담긴 지식에 매료된 경우라 소개했다. 나 역시 과학 독자로 텍스트에 담긴 지식에 매료된 경우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의 무질서함과 폭력적인 면에 염증을 느끼고 소립자의 세계에 매료되었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이 생각난다. E=mc² 같은 식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 방식으로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방정식으로 깔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세계를 대리석 무늬 속의 세계로 불렀다. 반면 “질척하고 우연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여러 갈래로 기복하는 세계” 즉 현실을 ‘나무 무늬 속의 세계‘라 불렀다. ’보행‘에서 동물의 세계를 모든 것이 투명한 세계로 설명하며 그들에게서는 “인간처럼 의도와 행위 사이에 연무(煙霧)처럼 나타나는 허위 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고 정의한 김영민 교수도 생각난다. 흥미로운 것은 김명남 씨가 변역한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논리이다. 김명남 씨는 이 책 번역으로 제 55회(2015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핑커는 현재를 가장 나쁜 시대로 생각하는 것을 인간 진화과정의 인식상 오류로 규정하며 폭력을 줄여온 요소를 인정해야 남은 폭력도 줄여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2015년 3월 19일 열린 ‘폭력은 과연 줄어들었는가’를 주제로 한 특강에서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자)는 물리적 폭력은 줄어들었지만 사회적 언어적 폭력은 더 심해진 것이 아나냐는 질문에 “좀 더 교활하게 행해지는 감시사회의 폭력, 정신적 폭력이 심화하고 있긴 하지만 핑커는 성폭력, 살인 같은 명시적 폭력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답했다. “주변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인구 대비 사망자가 줄었다는 숫자놀음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란 반문도 나왔다.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인 김명남 씨가 한 대답이 바로 핑커가 현재를 가장 나쁜 시대로 생각하는 것을 인간 진화과정의 인식상 오류로 규정하며 폭력을 줄여온 요소를 인정해야 남은 폭력도 줄여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2015년 3월 22일 한국일보) 물론 나는 현재를 가장 나쁜 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폭력이 줄고 있지만 전쟁, 종교 분쟁 등과 차원이 다른 개인의 폭력과 악마적 경향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을 우려한다. ‘그리워하지 않기’와 ‘질투 하지 않기’를 공부의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화두로 설정한 지 오래(‘보행’ 281 페이지)인 김영민 교수가 그립다. 이 그리움은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으로 세상을 비춰본 이후 더욱 깊어진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권택영 교수는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플로베르의 보봐리즘, 스탕달의 허영, 프루스트의 속물주의를 모두 매개된 욕망 즉 모방 욕망으로 정의하며 “이 모방적인 욕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한층 더 내적(內的)이 되어 라이벌의 관계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이고 살인이나 자살의 충동에 이른다.”고 썼다.(201 페이지) 질투라고 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경우 “사랑마저도 질투 없이는 하지 못한다.“고 하니 김영민 교수는 일찍이 그 위험성을 알아차렸음에 틀림 없다. 정일권 박사 역시 질투를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로 본다.(‘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326 페이지) 인간은 원초적인 모방 욕망을 앓고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임을 강조하는 라캉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이 모방 욕망의 시대를 부추기는 것 중 하나로 속속들이 공개되고 까발려지는 시대 정신을 들어야겠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수행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성숙이 갖춰지지 않은 채 세상에 태어나고 정신과 육체, 물질과 영혼의 갭이 큰 지금이야말로 수행이 절실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