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야기...
깨달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大寂光 명상 센터를 운영하는 백창우 거사의 ‘이것이 깨달음이다’(2014년 9월 출간)란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다. 물론 내가 깨달음에 관심을 두는 것은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교학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정도이다. 나는 바로 내 생각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책을 주문하기 전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백 거사는 ‘이것이 깨달음이다’를 출간한 까닭은 ‘읽다가 깨우치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단정할 수 없지만 이 내용은 책을 읽고 깨달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백 거사는 부처님의 중도설은 쾌락과 고(苦) 양 극단을 여읜 중도만이 아니라 너무 열심히도 하지 말고 게으르지도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한다. 백 거사에 의하면 “깨달음을 향한 적당한 세기의 마음은 독서 수행을 할 때 몰입하는 정도”이다.
앞의 말은 음식을 골고루 먹으라는 말을 메뉴 뿐 아니라 맛에 관한 지침이라고 말하는 한 한의사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뒤의 말은 책 읽기를 하는 나는 어느 면 수행을 하는 것이라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이다. 카페에는 글쓰기는 공부에 효과적이라는 말이 쓰여 있어 또한 관심을 끈다. 글쎄 나는 아직 미망(迷妄) 상태에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깨달음에 대한 글을 읽으면 피에르 바야르의 책들이 생각난다.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등... 이 부분에서 인용할 말은 “책을 읽고 나니 깨닫지는 못했어도 법문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6개월이 지났고 나는 체념했다”는 백 거사의 말이다. 그가 읽었다는 책은 ‘선문촬요’, ‘육조단경’ 등이다. 백 거사는 “3년 해도 안 되면 수행 관둬야” 하며 “깨닫고 나니 예전에는 관심 없던 그림도 작가의 의도를 읽고 이해할 수 있고, 싫어하던 클래식 음악도 내 본성을 두들기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글쎄 어려운 그림을 이해하고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깨달으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깨닫지 않았어도 그림을 보며 화가의 의도를 이해하려 하고 클래식 등도 두루 듣고 즐기는 사람은 굳이 깨달을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오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생각도 든다. “얽매여 있으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는 백 거사는 “스님들은 계율에 매여 있어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스님도 사람인데 욕구를 억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참 묘한 말이다. “얽매여 있으면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내 스승이었던 분의 지론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후자이다. “스님들은 계율에 매여 있어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는 선정과 지혜만 강조되고 지계(持戒)는 소홀히 하기에 문제라고(깨닫지 못한다고) 가르친 마성 스님의 말과 대비된다. 백 거사는 깨달음의 길은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그 이해의 정점에서 돌연 깨달음이 일어난다.
“나무를 열심히 문지르면 마침내 불꽃이 일어나듯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 거사는 깨달음을 사과의 예로 설명한다. ‘사과는 사과나무만으로는 생길 수 없는데 거기에는 태양, 공기, 땅, 영양분, 농부의 사계절, 낮과 밤의 적절한 기온과 기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지구, 태양계, 우주의 존재를 전제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으로 참여해 만들어진 것이 사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뉴턴의 과학을 공부할 때 생각하고 배우는 내용이 아닌가. 과학과 존재의 비밀을 이해하는 공부를 통한 깨달음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과 내용에 있어서는 같지만 체득(體得)면에서 부족한 것인가. 백 거사는 중요한 두 가지 말을 한다. 사유형인 사람은 연기법이, 직관적인 사람은 선 수행이 효과적이며 깨달음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깨달았다 해서 황수영 교수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에서 개진된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과라는 존재, 사과라는 생명체의 예를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는 베르그손,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 등 네 명의 철학자들을 생명과 생성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책이다.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은 거시적 그림에 강하겠지만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같은 책을 통해 깨달은(?) 사람은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면에 강하지 않을까? 키스 안셀 피어슨은 ‘싹트는 생명’에서 베르그송에 대해 언급한다. 피어슨에 의하면 베르그송은 본능과 지능의 유일하고 동일한 문제에 대한 서로 상이한, 발산적인, 그리고 동등하게 적절한 해결책들임을 분명히 했다.(107, 108 페이지)
피어슨의 말에서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교학 공부나 수행이나 유일하고 동일한 문제에 대한 서로 상이한, 발산적인, 그리고 동등하게 적절한 해결책들이라는 것이 아닐까? 피어슨에 의하면 베르그송은 “무기물과 생명체 간의 화해를 위한 길”을 마련했다. 베르그송은 이미지도 독특하게 파악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미지는 관념론자가 표상이라 부르는 것보다 더한 존재,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덜한 존재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도달할 수 있는 말은 입자(粒子)란 결코 완전하게 공간화되지 않는 운동이 어느 정도 공간적으로 응축(凝縮)된 것 또는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지연(遲延)된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본능과 지능, 무기물과 생명체, 입자와 에너지를 통합적으로 보는 베르그송 앞에서 수행과 교리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아도 되는가, 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것은 베르그송의 맥락에서 생명과 생성은 서로를 참조하는 순환적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시간의 작용과 생명, 세계의 미결정성, 우주의 미완결성과 대조적으로 우리는 너무 깨달음을 실체화하고 고정화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이런 나 자신에 대해 反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