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인의 김수영 시인론이 발표된 지 10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나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고 쓰는 과정이 매끄럽지만한 것은 아니다. 잘 쓰고 못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이끌리고 붙잡혀 알 수 없는 열정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간 미뤄두었던, 好惡가 뚜렷하다고 하지만 찬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김수영 시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이다. 단편적이지만 그의 대표시인 ‘풀’에 대한 의문점(바람이 눕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아니 바람이 눕는가?), 그 외 미로에 빠지게 하는 시들이 만들어내는 고뇌 등을 문제시한 이후 오세영 시인이 오래 전 김수영 시인이 신화화되었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지 않은 시 계간지 중 하나인 2005년 시인세계 가을호의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이란 글에서도 김수영 시인은 부정적으로(과대평가된 시인으로) 평가(선정)되었다. 문제는 2005년이란 연도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2005년은 오세영 시인이 두 달(1월, 2월)에 걸쳐 김수영 신화를 폭로(?)한 해이기 때문이다. 특기할 것은 김수영 시인이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이란 글에서도 신화화되었다고 지적받았다는 사실이다. 경북대 국문과 박현수 교수는 ‘김수영과 신화’란 글에서 서정주가 우리 시의 우익 정부라면 김수영은 좌익 정부인 셈이라고 말했다.(박현수 교수는 ‘파시즘 미학의 본질’의 공동 필자로 참여한 저자이다.)
그러고 보니 서정주, 김수영 두 시인 모두 논쟁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시인들이다. 곁가지이지만 서정주 시인의 이해에 있어서 혼란스럽지만 참고점이 되는 글이 두 편 있다. 구모룡 평론가의 ‘시의 옹호’에 실린 ‘초월미학과 무책임의 사상’이란 글과,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실린 나희덕 시인의 <낡은 구두와 ‘낡은 구두’>라는 글이다. 구모룡 평론가는 미당은 고뇌나 갈등 없이 쉽게 절대 영원이나 초월의 세계로 나아갔기에 진실하지 못한 시인이라 말했다. 나희덕 시인은 “미당의 역사적 과오와 문학적 성취를 균형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없을까“(‘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21 페이지)란 말을 했다.
미당의 경우 관건은 역사적 과오는 공인된 바 즉 부인할 수 없는 바이지만 문학적 성취와 관련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만일 서정주 시인이 문학적 성취에서마저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경우 역사와 문학 양면에서 평가받을 부분이 없는 시인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미당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구모룡 평론가는 미당의 문학적 성취는 별로 주목할 바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나희덕 시인은 성취를 인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오세영 시인이 김수영 시인의 시가 문학적으로 훌륭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것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오세영 시인은 일단의 문단 권력자들이 사적인 인연 때문에 김수영을 우상화했다고 말했다. 2005년 오세영 시인의 김수영 비판을 기사화한 기자는 그의 주장은 아직 소수론에 불과하지만 그의 말대로 앞으로 10년 후 문학계의 김수영론이 바뀔지 두고 볼 일이라는 말을 했다. 그 10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세영 시인은 ”참여시라는 것은 문학적 가치 개념이 아니“라며 ”참여시인인 까닭에 문학적으로 훌륭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시의 진정성을 떠나서 별 의미 없는 난해성이 문제거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이고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 한국시의 한 해프닝”이라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승하 시인/ 평론가는 “김수영을 향해 ‘60년대 한국시의 한 해프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는 그동안 갖지 못했다. 우리는 김수영의 시를 읽지 않고서 김수영에 대한 풍문을 믿어왔던 것이 아닐까. 너도나도 김수영을 외치니까 나 또한 올바른 판단력을 잃은 채 김수영의 시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문단의 병폐는 길고 긴 50년 세월 동안 김수영 시의 허실에 대해 논한 사람이 없었다는 데 있다. 물론 김수영이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시가 지닌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김수영을 우상으로 만들어온 것일까.”라는 말을 했다.
오세영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견강부회 해석하며 무슨 심오한 내용이나 있는 듯 떠벌리는 것은 코메디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 시인이 한 산문에서 황당무계한 말장난을 하듯 시를 썼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것이 16 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이다. 그는 ‘가르강튀아의 소름끼치는 이야기’에서 성경에 나온 말이라면 아무리 황당무계해도 의심하지 않는 교조적 태도를 신랄히 풍자했다. 이승하 시인/ 평론가의 말대로 우리가 어떤 시인의 시를 제대로 또는 별로 읽지 않고서 찬사에 빠지기는 쉽다. 물론 그 반대(제대로 또는 별로 읽지 않고 비판 또는 반대하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관건은 찬사의 경우 왜 그런가, 하는 반문이나 질문에 봉착하지 않는 반면 비판의 경우는 왜 그런가, 하는 질문이나 눈총을 받기 쉽다는 점이다.
이은정 교수의 김수영론인 ‘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을 읽기 위해 나도 그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읽었다. 내가 이 시집에서 확인한 바는 그의 시가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평가에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난해성을 문제시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열심히 읽지 않고 자신의 무능이나 불성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난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메시지가 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는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서정란, 박정희 등 원로 시인들의 말이다. 그들에 의하면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즉 밤중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랑 같은 것이다.
신경림 시인은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시는 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시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의 시가 특별히 난해한 것은 아닐 터이고 난해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참고가 되는 말은 박현수 교수의 김수영론이다. 앞서 언급한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에 실린 ‘김수영과 신화’에서 필자는 김수영 시의 장점은 시적 맥락에 난도질 혹은 우연성을 적극 도입한 진술 방식에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그의 시가 난해해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박현수 교수는 그러면서 여러 맥락들을 재배치하여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스타일리스트로서 그는 너무나 소외되었고 앞으로 김수영은 이런 스타일리스트로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 말했다.
나는 박현수 교수의 중도적 비판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분석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도질이면 난도질대로, 황당무계한 말장난이면 말장난대로, 맥락이 닿지 않는 문장이라면 또 그대로 읽어 무의식의 상처를 밝히고 이해하는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라캉주의자인 레나타 살레츨이 말한 것처럼 정신분석의 목적은 변화를 바라는 환자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 이면에 놓인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에 있다.(‘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78 페이지) 살레츨은 사랑은 합리적인 의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 무의식적 선택과 많은 관련이 있다는 말을 했다.
이해와 관련해 지적할 것은 시가 너무 시류에 따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김수영 시인과 관련해 지적할 부분을 오세영 시인의 김수영론을 통해 들여다 보자. 오세영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대표시인 ‘풀’에서 중심 이미지인 풀이 민초(民草)라는 한 가지 뜻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는 말을 했다. 동의할 만하다. 오세영 시인 말고도 풀을 하나의 의미로 확정적으로 말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음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 자신이 자신의 시에서 풀을 그렇듯 민초라는 하나의 의미로 읽으라고 부탁했는지 모르지만 풀을 하나의 의미로만 읽는 것은 시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쪽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아무리 시에 대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해도 작품이 지닌 범위나 영역의 제한 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꺼내야 할 말이다. 오세영 시인은 만일 풀이 알레고리가 아니라면 이 시에서 말하는 풀은 단순한 사실 차원의 서경적인 묘사이거나 시인의 내적 심성을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한 것 이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그러면서 그러나 이 역시 수준 높은 시적 형상화라고 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전자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풍경 묘사이니 말할 것 없고 후자의 경우는 시인이 표상하고자 하는 내적 감정이 막연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풀’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시인에 의하면 바람이 불면 풀은 의당 쓰러지기 마련이므로 사실의 기술인데 다만 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는 진술로 이 역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이 말 그대로 풀이든 민초이든 문제이다. 풀이라면 예상할 수 없었던 바이고 민초라면 현명하지도 바람직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시인은 바람보다 빨리 눕는 존재가 민초라면 건강한 민중의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기에 전체 논리에 위배되는 바 작품의 실패를 증거한다고 말다.
시인은 김수영 시인이 동풍을 비를 몰고 오는 바람(“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이라 했지만 사실은 생명의 잉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앞에서는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고 했는데(“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뒤에서는 바람보다 늦게 눕는다고 했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오세영 시인이 말했듯 바람보다 먼저 눕던 풀이 바람보다 늦게 눕는 존재로 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앞서 언급한 오세영 시인의 김수영 시인론이 실린 지면은 2005년 1, 2월 월간 현대시이다. 내가 참고한 김수영 시인론은 2005년 5월 문학동네에서 나온 ‘우상의 눈물’에 수록된 ‘우상의 가면을 벗겨라‘이다. 이 글은 김수영 시인에 초점이 오롯하게 맞추어진 글이 아니다. 그러니 온전한 김수영 시인론을 읽으려면 월간 현대시 2005년 1, 2월호를 읽어야 한다.)
시를 읽는 데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선입관을 배제하는 것이다. 지식의 덫에 걸려서도 안 되고 상상력의 한계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며 계급적 또는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인이 아닌 철학자가 읽은 김수영론이 필요하다. 김상환 철학자의 김수영론이 대표적이다. 지은이쪽에 초점을 맞추자면 자신도 모르는 내용을 시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경림 시인의 지론과 관계된 부분이고 오세영 시인이 김수영 시인의 ‘풀’에 대해 한 말과도 통한다. 분명한 사실은 시를 읽을 때 처음부터 오세영 시인처럼 치밀하고 구체적인 분석력을 가동할 수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세영 시인의 경우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덕이면 미덕이다. 다만 그런 것을 배제한 채 처음에는 느낌에 충실하게 읽고 차츰 논리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읽어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