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통스럽다고만 해서도 삶에서 즐거움만 보려 해서도 안 된다는...
블로그를 하게 된 이후 알게 되는 것들 가운데 결코 소홀하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전문 영역이라 할 것에 전력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특별히 전공을 하지는 않았다 해도 지속적인 관심으로 글을 읽고 쓰는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게감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조선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무*님, 서양사에 전문적인 관심을 드러내 보이는 박**님, 불교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고**님... 그리고 글쓰기를 희망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힘들다는 書..님까지...
이 마지막 사례자는 자신이 대상으로 생각 중인 분야가 재미보다 업계의 치부가 드러나기에 폭발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최근 국문학도라고 하기엔 독서의 영역이 너무 넓어서 무엇 하는 분인지 궁금하다는 글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른다. 나는 그냥 요즘 평소보다 시를 더 많이 읽고 시론집이나 평론집 리뷰를 하고 변함없이 서평 이벤트에 참여해 과학, 철학, 인문, 경제, 불교 관련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고 리뷰를 쓰고 있을 뿐이다.
오래 전 내게 가르침을 주셨던 스님은 이생에서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다음 생에서 잘 살 리 없고, 세속에서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수행을 잘하는 승려가 될 리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이번 생은 나가리야, 다음 생을 기대해야지” 하는 한 시인의 페이스북 글을 읽었다. 이 시인에게 그 스님의 말씀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데 계절적 요인까지 겹치면 사는 게 무의미하고 회색빛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고통이 시(詩)의 뿌리가 되니 소중히 여기라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상기(上記)한 스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내게 무엇 하는 분인지 궁금하다고 한 그 블로거의 글이 겹쳐 나로 하여금 떠오르게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읽고 쓰는 데에서 보이는 탈중심의 지향성이 나를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떠도는 사람처럼 느끼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음을 뜻하는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를 실천하기는 어렵게 느껴지기만 한다.
이 파테이 마토스란 경구(驚句)를 제목으로 삼은 책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영원히 되돌아오기를 바랄 만한 삶 또는 영원히 되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으로 설명한 철학자의 미소가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삶을 영원히 돌아오기를 바랄 만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삶에 그런 가치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특이하게도 전혜린 작가는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말을 했다. 물론 중요한 점은 이 말이 니체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은 그렇게 괴로울망정 다시 되풀이하고 싶을 만큼 좋은 것일까? 니체의 말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어도 좋다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닮은 듯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조지훈 시인을 염두에 두고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한 김수영 시인에게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어도 좋다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다.
조지훈 시인은 ’마음의 태양‘에서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같이 /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설계하자”고 노래했었다.(’설계하자‘가 아닌 ’살게 하라‘라고 말하는 곳도 있다.) 이는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고 한 니체와, 그의 말을 되풀이한 전혜린 작가에게 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은영 시인이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석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접근 대신 ‘소수 문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카프카를 시대 상황에 예민했던 정치적 작가로 규정하려 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정신분석으로 해명한 책인 잭 도미니언의 ‘인간 예수’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에 그런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인간성을 충분히 드러낸 명백한 인간이었다. 예수를 예외적인 인간 존재로만 묘사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성과의 연결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신성에만 집중한다면 그의 인간성의 특별한 자질들을 놓치게 된다.”(289 페이지) 이 말이 내게는 마치 삶을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보아 버려야 할 것으로만 여겨서도, 삶은 고통스러워도 다시 되풀이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아니면 삶을 고통스럽다고만 해서도 삶에서 즐거움만 보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든지.
이런 차원에서라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이 모든 사람들은 냄새 나는 진흙을 보면서도 오직 연꽃을 보아야 한다.”(미즈노 고겐 지음 ‘경전의 성립과 전개’ 102 페이지)는 불교 경전 번역가 구마라집의 말도 옳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냄새 나는 진흙 속에서도 긍정할 미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그 어렵다는 파테이 마토스로 돌아온 것이다. 번뇌의 연쇄가 아닌지? 늘 하는 말이지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시정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悤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