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야기...

입적(入寂), 열반(涅槃), 법랍(法臘), 다비(茶毘), 해탈(解脫) 등의 단어를 알게 된 사연이나 그 단어들을 대할 때의 감정은 다 다르다. 수도자 또는 승려의 죽음을 뜻하는 입적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반면 열반(涅槃)은 다르다. 유여(有餘) 열반, 무여(無餘) 열반 등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전자는 번뇌를 지닌 육신이 남아 있는 상태 즉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하고 후자는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法身)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고 한다. 몸이 번뇌를 가진 것이라는 표현은 다소 의아하기도 하고 이해될 것도 같다. 입적이란 단어를 보며 나는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진공(眞空)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고전 역학에서 진공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인 데 비해 양자역학에서 진공은 마이너스 에너지의 바다 또는 입자와 반입자 쌍이 무(無)를 들락거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들끓는 바다이다. 평행 우주론에서 말하는 ‘거품 같은 우주들이 끝없이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발상’은 이 입자 반입자 쌍의 생성과 소멸을 닮았다. 아니 그 연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적이란 단어를 보며 진공을 떠올리는 것은 그것이 과연 완전한 무(無)의 상태일까, 하는 차원에서이다. 법랍은 고승들의 승려 생활의 연수를 계량하는 단어이다. 나는 이 단어를 일지 스님이 성철 스님을 회상하며 쓴 추도문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다비는 김승희 시인의 ‘다비를 보며’란 시를 통해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이란 의미는 시기적으로 처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만났다는 뜻이다. 요 며칠 죽음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었다. 마음을 짠하게 하는 것은 평소 자신이 죽으면 목판을 하나 사서 같이 태워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는 한 스님의 이른 죽음(48 세)이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최윤 지음 ‘회색 눈사람' 마지막 문장)란 글을 떠올리게 된다. 사형을 앞둔 뫼르소가 생전 처음으로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카뮈의 ’이방인‘ 역시 죽음 소설이다. 뫼르소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카뮈가 말하려는 것은 삶 = 형벌이란 인식이 아닐지? 그렇다면 뫼르소에게 죽음은 해탈(解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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