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살아볼까]내가 조선의 에미다

확실히 봄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양이다. 절해고도로 유배온(?)내가 너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지인들이 실상을 확인하러 섬에 내려오는 계절은 희한하게도 딱 이맘때이다.


하긴 내가 습하고 견디기 힘든 더위도 피하고 바람으로 문을 열기도 힘들만큼 지독한 추위도 심한 계절에는


아예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 두었던 이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몇 번 지인들이 방문을 하다보니 이른 바 메뉴얼이 생겼다. 언제 올 예정인지 날짜가 정해지면 이불빨래를 시작한다.


사실 때가 많아서 하는 세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묵혀두었던 퀴퀴함을 떨치기 위한 세탁이긴 하지만 이불장에 켜켜히


눌려져있던 이불들을 햇살과 바람에 뽀송히 말리고 준비하는데 이틀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게을러서 미뤄두었던 묵은 청소가 시작된다. 마침 텃밭도 잘 고르고 고추며 호박등을 심는 철이 지나 보기 좋게


정리가 된 터라 집주변과 텃밭 주변에 널려있던 너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목욕탕과 화장실청소를 한다.


그리고 살림에 젬병인 내가 가장 보여주기 싫은 냉장고정리도 한다.


 


이러저러 겨우 지인들이 올 날짜를 맞춰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나마 집이 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깨끗한 속살이 보이는 집을 보면 해마다 두 세 차례 손님을 맞아야 집도 좋아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는 초등학교 여동창들 8명이 방문해서 살림못하는 나를 위해 김치까지 담궈놓고 올라갔었다.


며칠 전에는 후배와 그의 친구 가족들 8명이 찾아들었다.


5월 황금연휴를 맞이하여 일찌감치 배표가 매진될까 지난 겨울 미리 예약까지 마쳐 두었었다.


그나마 이번 세월호사고로 같은 해운회사의 배는 영업이 중지된 상태라 배표 구하기가 엄청 어려워 뒤늦게 여행을 계획한


사람들은 섬에 들어오지도 못했단다.


 


영주에 사는 부부와 딸내미 둘, 안산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들 둘과 몇 년전 거문도 여행을 들어와 섬을 사랑하게 된 소년이


함께 들어왔다. 녀석은 5학년 때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들어와 섬 일주를 한 후 계속 엄마를 졸라 섬에 다시 들어가자고 했단다.


혼자 보내기는 뭐하고 엄마는 워낙 바빠 미루고 미루다 이번에 엄마의 선배인 지인들을 따라 함께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 섬주변을 걷고 있던 녀석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의바르고 묻는 말에 어찌나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하던지 책을


많이 읽었느냐고 물었던것 같다. 엄마도 여간 야무져 보이지 않는데다 아이를 참 잘 길렀다고 맘속으로 생각했는데 그 때 녀석이


내 손님이 될지는 알지 못했다. 녀석의 똘망했던 기억이 강렬해서 녀석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내 후배와는 '똑똑이'라는 별칭을


붙여줬었다.


 


뱃머리로 마중을 나갔더니 짐이 한가득이다. 누구든 섬을 찾아든 지인들에게 아예 먹고 갈 먹거리와 생필품을 사오라고 당부하곤


했는데 역시 아이스박스에 종이박스까지 내 조그만 차에 실으니 사람 탈 공간이 없다.


삼겹살에 과일, 야채까지는 그렇다치고 쌀까지 챙겨올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긴 여긴 쌀도 귀하지.


설마 집에 쌀이 없을까봐 그랬나 싶다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배려가 느껴져 기특하기도 하다.


여수에서 아침 7시4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타기위해 영주에서 공주, 안산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밤새 타를 타고 왔을 것이었다.


아침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들어왔을 것 같아 미리 아침겸 점심을 준비했다.


전날 달래며 미나리를 캐와 손질해두었던 것을 무치고 며칠 전 서도의 통발하는 집에서 얻어온 문어를 데치고 새밥을 해두었다.


역시 모두가 시장했던지 없는 반찬에도 달게 먹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거문도 등대를 다녀오겠다고 우르르 나서는 걸 보니 섬에 처음 들어올 때 내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가을날 하늘보다 더 푸르렀던 바다에 반해 다시 찾아들었고 결국 이렇게 이 곳에 닻을 내리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그 기억들이


어느새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섬에서는 귀한 소머리까지 들고와 아랫방 아궁이에서 삶고 요즘 한창 잡히고 있는 농어를 잡아 회를 쳐서 저녁을 먹었다.


도시 횟집에서 먹던 회맛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달기 단 회를 모두 맛있게 먹는다.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다음 날 거문리를 일주하고 배를 타고 낚시를 즐겼다.


 


 







 


선상낚시는 처음이라 모두들 설레는 분위기였는데 하필이면 고기가 외지사람을 알아보았는지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영주에서온 딸내미들 엄마도 배멀미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일찌감치 낚시를 접고 돌아와 아랫방에서 긁어온 숯을 모아


삼겹살을 구어 먹으니 불판에서 구워 먹었던 삼겹살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있단다.


이번 방문을 진두지휘했던 후배가 술에 취하고 바다에 취해 말이 좀 많아진다 싶더니 갑자기 둘러앉은 사람들 손금을 보자고


난리다. 손금에 'M'자가 있으면 대단한 명을 타고 난 사람인데 자기는 없는 'M'자 손금을 가진 사람을 찾는단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본 적이 있는것도 같은데...둘러앉은 사람들은 잔뜩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자기손들을


쳐다보느라 부산하다. 그러고보니 내 왼손에도 'M'자가 보이고 몇 몇 사람들 손에도 'M'자 손금이 보인다.


"거의 모두 'M'자가 있는데? 너는 없어?"


"어? 이상하다 이 'M'자 손금이 귀한건데 어디봐.."


후배는 서로 자기 손에 'M'자가 있다는 지인들의 손금을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충 희미하긴 하지만 'M'자가 만들어지는 손금이 많다. 이젠 이렇게 희미한 거 말고 선명해야 한다고 우기는 후배에게


"너만 없다. 'M'"하고 일갈했더니 죽을 상을 짓는다.


그중 비교적 선명한 왼손의 'M'자 손금을 들어보이며 또 한마디 한다.


"내가 조선의 'M'이다."


 


 

그동안 조용하던 집안에 사람들 웃음이 넘치고 맛있는 고기와 술로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