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블로그
내 블로그 역사가 시작된 곳은 2004년 엠파스 블로그이다. 지금 그 블로그는 해체되었고 엠팔 메일만 남아 있다. 그때 이글루스로 옮겨 오랜 시간을 지내왔는데 작년 석연치 않은 실수로 자료가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엠파스 블로그는 내 첫 블로그이고, 부천에서 주니어 토익을 가르치던 한 블로거가 만나자는 바람에 준비(?)도 안된 채 만나 두, 세 차례 데이트를 한 인연이 있던 곳이다. 당시 그녀는 내가 정서, 취향, 책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이상형인데 돈이 없어서 안 되겠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했다. 당시 나는 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쿨한 이별사를 떠올렸다.
'관계는 순조로웠고 그녀는 따스하고 상냥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설명도, 그리고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나를 떠나갔다. 그야말로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마치 일출을 따라 귀가하는 무슨 유령처럼, 뒤범벅이 된 내 말의 성찬(盛饌)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찻집을 나서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지금도 선연히 기억한다...‘ 그러나 내가 위로를 받은 것은 그 별사(別辭)가 아니라 내가 사는 시골 의료원의 신졍정신과 방문을 통해서였다. 비싼 진료비 때문에 방문은 두 번에서 그쳤지만 임상적 우울증도 아니고 다른 정신과적 문제가 있어서 병원을 찾은 것도 아니고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한 방문이었으니 두 번의 방문이 애초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당시 내 마음을 움직인 것들 중 하나는 정신분석을 받는 것이었다. 여성학자 성미라란 분이 말했듯 정신분석은 19 세기 말 신경증에 걸린 귀부인들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에서 등장했다. 그 분은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시간당 7만원의 돈을 지불하며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페미니즘과 정신분석‘ 252 페이지)는 사실이다. 물론 내가 치른 진료비는 7만원의 1/3 수준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인가 심리치료인가, 또는 정신과 (被)진료인가가 아니다.
작년 여름 강화도의 한 수행자를 찾아갔었다. 그것도 내게는 신경정신과 방문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 분이 내게 들려준 말은 수행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행을 하라는 그 말을 듣고 그래서 저 분을 수행자라 하는 것이구나란 생각을 했었다.
이글루스 블로그는 인터넷 서점에서 운영하는 서재 형태의 블로그가 아닌 개인 블로그여서 남다른 면이 있었다. 한 출판사로부터 서평단 제의를 받은 것도 그 블로그에서였고 ’그림, 눈물을 닦다‘의 저자로부터 감사의 글을 받은 것도 그 블로그에서였다. 2006년 가을 그 블로그에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한 블로거의 유럽 여행 기념 이벤트가 있었다. 나도 1등은 하지 못했지만 등수에 들어 그 블로거가 포르투갈 lisboa에서 보내준 엽서를 받았다.
블로그가 삭제되었지만 고향 같은 그 곳을 가끔 들르곤 했다. 그리고 내게 리스보아(리스본)의 트램 사진과 함께 유럽의 서정을 가을 인사에 담아 보내준 그 블로거의 페이스북 주소를 알게 되었다. 친구 신청을 해 수락받아 인사를 주고 받았다. 친구 신청을 받고 나서 그 리스보아 엽서 이벤트 사실을 말하기로 했었다. 엽서의 추억은 내게 의미 있다. 엽서 자체도 그렇지만 당시 울산 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에 머물던 내가 주소를 연천(지금의 집)으로 해 받아 다시 택배로 받았기 때문이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는(지금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그곳은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광어 양식장에서 보이던 20여 미터 거리의 그 바다는 짙고 푸르렀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그곳에서 가까운 중학교 운동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뛰던 생각이 난다. 요즘 내가 일하는 곳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당시 그곳 중학교에 깔려 있던 것과 같은 인조 잔디를 까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어디에나 그런 인조 잔디는 있는 것이지만 당시 그곳 중학교와 내가 일하던 곳을 회상했다.
하늘이 파란 이유와 바다가 파란 이유는 같지 않다고 한다. 하늘이 파란 것은 파장이 짧은 파란 빛이 대기 중의 질소, 산소 분자 등과 부딪혀 산란되기 때문이다. 반면 바다가 파란 것은 바다 표면에 하늘색이 반사되기 때문이고, 빨간색이 흡수되고 남은 청록색이 물속의 물질에 흩어지면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물 분자가 빨간색 파장을 흡수하는 것은 물 분자 속의 수산기(-OH)의 진동 때문이다. 빨간색 빛이 흡수되면 빨간색의 보색(補色)인 청록색이 남는다. 그렇게 빨간색이 흡수되고 남은 청록색 빛이 먼지나 플랑크톤 등과 충돌해 흩어지면서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바다는 파랗다. 하늘이나 바다가 파란 것을 불교식으로 무자성(無自性)의 인연(因緣)에 의한 것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DSLR 카메라 촬영법과 여행 작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고장의 문화 강좌 소식을 보며 여행작가 일이란 참 어려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어제 밤부터 내린 비가 그친 아침 FM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풀랑의 플롯 소나타를 내보내고 있다.(2014년 5월 8일 아침 9시 17분 현재)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과 하늘을 가볍게 해주려는 것인지...풀랑의 곡은 이베르의 플롯 소나티네와 함께 그 무렵 플롯 소리에 매료되어 즐겨 듣던 곡이다. 요즘은 작고 섬세한 실내악보다 점점 무겁고 어두운 교향곡, 협주곡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 특히 말러의 곡이 그렇다. 말러의 곡은 어떤 곡이라 할 수 있을까?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보낸 날이 없다는 그의 무거움은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결과가 분명 아니리라. 바흐의 엄격한 탈속의 곡들과 감정의 늪이자 바다인 말러의 곡들을 두 갈래로 삼아 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