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풀이 중인 400년 전의 문집(文集)}]
* 초벌 번역이다.
「여허후항 의흥현감조한빈 신령현감성력 전삭령군수도경유 공화계정(與許矦恒 義興倅曺漢賓 新寧倅成櫟 前朔寧倅都慶兪 共話溪亭)」
허후(항), 의흥현감 조한빈, 신령현감 성력, 전 삭녕군수 도경유와 더불어 계정에서 함께 담소하다.
『東溪文集』 卷之二
探勝期酬昔所聞탐승기수석소문 유람할 약속 옛날에 들었는데
盍簪今見意慇懃합잠금견의은근 빨리 만나 오늘 보니 정회가 간절하네.
他時宿賞三兄弟타시숙상삼형제 전날 유람할 때 삼형제가 있었는데
此日風流四使君차일풍류사사군 오늘 놀이에는 네 명의 원님들 모였네.
罇酒若波情自倒준주약파정자도 술두루미 물결 이는 듯 마음은 절로 기울이고
韶光如箭日將曛소광여전일장훈 봄빛은 쏜살같고 해는 지려하네.
莫牽世務催相別막견세무최상별 세상일 핑계대어 이별 서두르지 말고
舟子重來路不分주자중래노불분 뱃사공 거듭 오니 아직 헤어지지 않았네.
__ 不二堂 번역 풀이 __
* 허항(許恒, ?-?)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 별좌(別坐) 허사익(許思益)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3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 등을 역임했다. 1616년(광해군 10) 50세 되던 해에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서 전적(典籍)이 되었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왔다. 인조반정 후에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있을 때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켰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는 강화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돌아와 좌승지(左承旨)로 승진되었다가, 직언 상소를 올려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좌천되었다. 효종 때 도승지(都承旨)로 증직(贈職)되었다.
* 조한빈(曺漢賓, 1583-1640)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관보(觀甫), 호는 계음(溪陰). 담양 출생.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27년 참봉에 이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관직을 거쳐 의흥현감으로 나갔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에 응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병마와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성학(聖學)을 연구하여 후진에게 강설하였으며, 『근사록』과 성리설 등을 연구함과 동시에 언행의 일치에 역점을 두었다. 1678년(숙종 4) 소무영사이공신(昭武寧社二功臣) 1등이 되었다. 저서로는 『계음집』 4권이 있다.
* 성력(成櫟) : 성력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성범석(成範錫, 1698-?))과 관련하여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조는 성력(成櫟)이고, 조부는 성희주(成熙胄)이며, 부친은 성지민(成至敏)이다. 외조부는 한송(韓松)이고, 처부는 이세련(李世璉)이다.
* 도경유(都慶兪, 1596-1636) :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洛陰).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묘호란 때 호남으로 세자를 호종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금부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쌓아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그 죄로 유배 가던 도중에 죽었다. 뒤에 이 화약폭발사고가, 그의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승지로 추증되었다. 대구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음집(洛陰集)』 6권 2책이 있다.
* 합잠(盍簪) : 벗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모여듦. 선비들의 회합. 합시(盍戠)라고도 함. 『주역』「예괘(豫卦)」에 “의심치 말라. 벗들이 모여들 것이다(勿疑 朋盍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