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처음 이 섬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바로 글을 쓰는 작가때문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있다.
유독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서 작가가 사는 섬에
가서 작가와 함께 경치도 보고 술도 한잔하는 행사가 있었다.
섬출신의 작가가 쓴 몇편의 작품을 통해 막연하게 그렸던 섬을 직접 본다는
설레임과 작품으로만 만났던 작가는 어떤 느낌일까..그런 궁금증으로 거문도는
출발하기전부터 미지를 향하는 낯설음과 기대가 함께 했었다.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광주로 다시 셔틀버스로 녹동으로 가서 여객선을 타는
여정은 길고도 피곤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늦둥이 아들녀석의 날선 반항에 무너져내렸던 마음도,
오랫동안 돈벌이에 지쳤던 세상살이도 잠시 내려놓는다는 홀가분함 때문인지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섬은 아름다왔다.
1미터가 훨씬 넘는 삼치로 회를 떠 상도 없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차려진 밥상도
임금의 수랏상처럼 과분했고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는 술은 섬의 맑은 공기때문인지
행복한 마음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반주도 없이 터져나왔던 노랫소리로 지나온 피곤을 씻고 함께 한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
내 삶의 어느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마냥 친근하게 다가왔다.
뱃머리에 마중을 나와 자신이 사는 집까지 안내를 했던 작가는 생각보다 소박하다 못해
헝클어진 머리와 신경쓰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은 산속에 홀로 수행하는 기인처럼 느껴졌다.
거문도의 명물인 삼치를 대접하고 싶어 고기가뭄에 삼치 잡히기를 기원했더니 겨우 그 날
새벽에 삼치가 잡혀 반가운 마음으로 회를 썰었노라고 하는 작가의 웃음이 넉넉했었다.
간단한 세간살이와 꾸밈없는 태도가 세상을 초월하겠노라는 당당함같은 것이 있었다.
그 저녁만찬에 하필이면 내곁에 앉은 남자가 있었다.
섬근처 가두리에서 일을 한다는 남자의 존재를 처음엔 알지 못했었다.
술이 거반 너댓병이 오가고서야 무심코 내 술잔에 술을 따르던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거북이등처럼 두텁고 단단히 박힌 굳은 살들이 남자가 지나온 지난한 시간들을 짐작케했다.
경남의 어느 도시에서 낳고 자랐다는 남자가 왜 이 섬끝까지 들어와 살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마치 바코드를 읽는 스캐너처럼 읽혀졌다.
왜 그리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아픔이 느껴졌는지는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흔히 지나온 자신의 삶을 글로 쓰면 소설이 몇 권이라는 말처럼 그 남자의 삶도 그러했다.
그 남자의 지나온 시간들은 섬에 사는 작가의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말수가 적었던 남자가 작가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제법 따랐던 모양인지 말하기 힘들었을
자신의 삶을 얘기했다.
경치로는 너무 아름다왔던 섬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내가 그 글을 읽었다.
아이처럼 웃음을 머금고 선한 눈빛을 했던 남자에게 그야말로 소설같은 시간들이 숨어있었다.
어찌하여 그 남자의 내세울것 없고 드러내기에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활자가 되어 나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활자의 위력을 알지 못했다.
그저 글을 쓸만큼 아는 것많은 형이 자신을 동생처럼 대해준 것이 고마웠고 자신의 어두운 이야기를
비난없이 들어준 형이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를 좀 써도 되겠냐는 형의 물음에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단다.
섬에는 여자가 늘 부족했다.
불과 10여년전에도 고깃배에서 내린 어부들에게 술을 따르고 정을 나눴던 여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여자들에게 넘어가 돈도 잃고 마음도 잃은 남자들도 부지기수라 딱히 할일없는 섬남자들이
심심풀이 수다꺼리에 이 남자가 오르내리게 된다.
어떤 정신나간 놈은 몇 천만원을 뜯겼는데 고작 몇 번을 잤으니 한 번 잔값은 얼마인가...
그렇게 매겨진 순위에 그 남자는 상위 몇 위에 올랐다고 했다.
그 남자가 섬에 들어오기전 귀밑머리를 풀었던 여자부터 섬에 들어와 술을 따르던 여자와 어찌 어찌
정을 나누었다는 얘기부터 '그 남자의 연애사'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고 기어이 여자에게
돈을 떼인 장면에서는 그의 어리석음에 혀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 그 남자가 어쩌면 치부랄수도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라는 허락을 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작가가 섬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진 작품을 빼면 작가가 경험했거나
어디어디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많았다.
글을 써 밥을 벌어야 하는 작가라면 어디에서든 글꺼리를 얻어야 했을 것이다.
제법 글쓰는 재주는 있으니 들었던 이야기에 살을 붙여 자신의 작품처럼 세상에 내놓는 일은 쉬웠을 것이다.
그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의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가 버젓이 세상에 나온걸 알고 경악한다.
그저 조금 자신의 삶에서 뼈대 몇개쯤 추려낼 줄 알았던 자신의 허락이 이렇게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꽂힐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게 문학은 닿지 못할 세상의 신기루같이 잡아본적 없는 미지였고 무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오는 순간 흩어져버리는 말에도 살을 베이는 날이 존재하는데 하물며 또렷이 형체가 남는 글의 힘이란
저울로 잴 수가 없다.
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역사를 보면 안다.
글로 밥을 버는 사람에게는 소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글이 세상을 잘못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가 되기도 하고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혹여 자신의 글로 누군가 상처받는다면,
특히 세상에 죄지은 일 없는 사람에게, 어쩌면 자신보다 품이 넉넉함에도 아무도 그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는
이가 없는 외로운 사람에게는 이파리하나 흔들지 못하는 연약한 바람에도 상처입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한 남자의 가슴을 무너지게 한 글로 밥을 번 작가는 행복한지 묻고싶다.
존경하는 어느 작가는 가난한 조국의 불쌍한 백성들에게 공장이나마 돌리는 기사가 되어 밥을 먹이고
싶었노라고 했다.
작가란 글을 팔아 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 글로 사람들에게 배부름을 줄 수 있는 품이 있어야 한다.
무심코 돌을 던졌는데 우연히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는 경우보다
각성이 입혀진 글쓰기에 혹시라도 다친 사람이 없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누군가는 댓글 하나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 않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대지에 뿌려진 씨앗과도 같다.
좋은 씨앗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독을 품은 씨앗은 독초가 되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렇게 후배의 과거이야기를 100%리얼로 글을 써서 발표하는 사람이 진정한 작가일까요?
당사자는 지금 엄청난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법적인 대응도 고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