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풍경, 그리고 요즘 읽기에 대해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그의 서재(書齋)를 돌아본 어느 팔레스타인 사람으로부터“선생님은 이 책을 모두 읽으셨는지요?”란 물음을 받은 적이 있다. 프랑스는 이에“아마 십분의 일도 채 못 읽었을 걸요. 당신도 세브르 도자기를 매일 사용하시지는 않을 텐데요.”라 답했다. 여기서 나온 세브르 도자기는 센 강 좌안(左岸)에 위치한 세브르(Sevres) 지역의 명품 도자기를 말한다. 어떻든 십분의 일도 채 못 읽었다면 프랑스라는 대작가에게는 의외의 비율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대답 중 뒷 부분은 동문서답에 가깝다. 그 팔레스타인 사람이 물은 것은 프랑스가 서재에 꽂힌 책을 다 읽었는가, 인데“도자기를 매일 사용하시지는 않을 텐데요.”란 프랑스의 말은 프랑스의 서재에 꽂힌 모든 책을 매일 다 펼쳐보느냐는 질문에 합당한 답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말은 책을 꽂아 놓거나 사 놓고 읽지 않는 비율이 완만하게일망정 높아가는 나에게는 위안이 되는 말이다. 나는 지난 해‘우호적인 무관심’이란 책에서 ”지금 당장 손에 넣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으로 책을 사는 경우가 있다는 저자의 글을 읽고 동지의식 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 감정은 죄의식을 면제받았을 때 가질 수 있는 차원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의식이라기보다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했다는 부담감이라 해야 옳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어느 정도의 책을 가지고 있어야 읽지 않는 책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죄의식이나 부담감을 가지게 될까? 이제 나도 사면(四面)은 아니지만 두 면 정도가 책들로 가득한 방을 갖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런 벽 만들기에 성공했다. 책을 어떻게 배열하며 방의 크기는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런 서재를 갖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백지와 만년필만 가지고 책 한 권 없는 파리나 로마의 카페 한구석에 한가롭게 앉아 술술 글을 뽑아냈다는 사르트르가 있지만 나의 경우 글을 쓰는 데 내 방 벽을 두 면 정도 채운 책과 함께 있으면 황홀하기도 하고 글을 쓸 때 참고가 되는 책들과 함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다. 나는 책이라는 선수(選手)들을 보유한 감독인 셈인데 책 살 돈을 넉넉하게 가지지 못했던 과거에는 한 권을 사더라도 전편(全篇)을 읽고 리뷰를 쓸 책이나, 참고하더라도 많은 부분을 참고할 책을 샀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만을, 때로 한 줄의 글을 인용하거나 그로부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사거나 지금 당장 그런 점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그런 경우를 기대하고 책을 사기도 한다. 그렇게 책이 늘다 보니 과거에는 축구 선수를 기용하듯 책을 읽거나 또 그런 것을 기대하고 읽었지만 지금은 야구 선수를 교체하듯 책을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축구는 선수 교체 횟수가 제한적이어서 야구처럼 한 번의 대주자, 한 번의 대수비, 한 번의 대타자, 원포인트 투수를 기용하듯 교체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바람을 담은 집’에 책읽기에 관한 특별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지금은 유명한 교수가 된, 프랑스 유학 시절 공부벌레로 유명했던 친구 K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공부 벌레로 소문난 K의 책장에 책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책을 빌려 읽는 것도 아니었던 K가 가졌던 비결은 달리 있었다. 한 가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책을 꼼꼼히 끝까지 다 읽고 그런 책들이 어느 정도 쌓이면 종이상자 속에 집어넣어 치우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만 책장에 꽂아두고 하나씩 읽기 시작한 것이다. 내 경우 리뷰를 쓰게 된 이래 통독(通讀) 비율이 대단히 높지만 한 가지 난점에 처하곤 한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주제의 책 두 권 이상을 함께 읽을 때 발생하는 문제로 복수(複數)의 책에 대해 모두 리뷰를 쓸 것인가, 한 권은 참고로 하고 다른 한 권에 대해서만 리뷰를 쓸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는 것이다.‘바람을 담은 집’에 K가 다 읽은 책을 팔아치웠다거나 버렸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니 K는 다 읽은 책을 한 구석에 쌓아 두고 필요하면 다시 꺼내 읽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아무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임이 명백하거니와 원포인트로 투수나 타자를 기용하듯 책을 읽어서는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K의 사례는 책을 치워두기 위해서라도 통독을 해야 함을 알게 한다.(책을 치워두기 위해 읽는 사람은 없겠지만.) 문제는 부분을 읽기 위해서도 통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내 경우 재작년‘붓다 브레인’을 빌려서 읽고 리뷰를 쓴 후 올해 그 책을 중고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재작년에 읽을 때는 당연히 빌려 읽었기에 밑줄을 칠 수 없었고 그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지금 새로(?) 산 중고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으려 해도 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인용도 밑줄을 치며 통독한 이후의 일이어야 효율적임은 말할 것이 없다. 리뷰는 책 전체의 개략적 흐름을 짚는 것이지만 전체를 아우를 수 없고, 밑줄을 친 부분을 따로 또는 전체적 맥락과 별도로 참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기억의 중요성을 말해 주기도 한다. 물론 밑줄치는 행위에 기반을 둔 기억이다. 일본의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생명을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앞서 자신을 파괴하고 재구축하는 순환 상태 즉 동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규정한 바 있다. 기억 특히 밑줄을 치는 것에 의해 기억을 보장(保藏)하려는 것은“엔트로피의 사면(斜面)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철학자 베르그송의 표현)에 비유될 수 있다. K의 이야기는 오경웅의‘선학의 황금시대’에 나오는 백장(白丈)의 학인(學人) 향엄(香嚴)을 생각하게 한다. 뛰어나게 재기발랄하고 논리적이며 분석에 능했던 향엄은 그로 인해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샀다. 향엄은“자네가 부모에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이야기좀 해주겠는가?“란 위산선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읽은 책들을 모두 불태우고 행운유수(行雲流水)를 하게 된다. 향엄이 받은 질문은 선불교(禪佛敎)와 교학불교의 위상 차이, 존재론적 집합표상과 사건(변화)의 관점으로 사물을 대하는 차이를 드러내주는 사례이지만 그런 점들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던져주는 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효가 지났거나 효용이 별로 되지 않는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란 문제이다. 여담(餘談) 같지만 K의 행동을 따르기 어려운 것 몇 배 이상으로 향엄의 행동은 따르기 어렵다. 우리가 언젠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속에 버리지 못한 사이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좋은 새 책들은 밀려들듯 나오는 사태는 현명한 결단을 요구한다. 기억력이 뛰어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고 책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고 그 두 경우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책이 많지도 않은데 필요한 책을 찾다가 10분 이상을 소비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렇게 뒤지고 또 뒤져 찾아낸 책이 인용할 부분이 없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경우 그 책이 실제로 필요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K처럼 과감히 치워둘 필요가 있다. 좋은 책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사실 잔인하다. (읽을) 시간과, (채울) 공간과, (살) 돈과, (이해할) 능력 부족 등이 두루 얽혀 실제 구입하는 책은 한정적이어서 시대에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리는 것이 요즘 내 일상이 되었다. 새 책에 대한 열망을 새것 콤플렉스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좋은 책들이 너무 많이 쉴 사이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