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기...카뮈에서 스테판 에셀까지
장 그르니에와 알베르 카뮈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그럼에도 그 두 사람은 문학적 동지로서 애정과 배려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그르니에가 34세, 카뮈가 19세였을 때이다. 그렇게 만나 우정을 나눈 두 사람의 관계는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타계함으로써 28년만에 끝을 맺고 만다. 그들이 주고받은 수백통의 편지를‘카뮈 장 그르니에 서한집: 1923 - 1960’이란 책으로 펴낸 출판사에 의하면“‘장 그르니에가 없었다면 알베르 카뮈도 없었을 것’이라는 쥘 루아의 말에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더라도 알제 빈민구역의 병약한 소년에게 젊은 교사 장 그르니에가 없었다면 카뮈의 인생은 퍽이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르니에의‘섬’에 대한 발문(跋文)격의‘섬’에 부쳐서란 글에서 카뮈는 알제에서 자신이‘섬’을 처음 읽은 것은 스무 살이었다고 말한다. 카뮈, 하면 사르트르와의 대립 특히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한 가혹한 말을 기억하는 나에게 그르니에에 대한 카뮈의 말은 온화하고 종요롭게 여겨진다. 가혹한 말이란“당신이 이제 내게 어떤 응답을 해도 나는 당신과 논쟁을 계속하는 것을 거절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침묵이 이 싸움을 잊어버리게 해주기를 바랍니다.”,“혹 내 말이 당신에게 너무나 가혹하다고 여겨지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머지않아 같은 어조로 비판할 예정이오.”란 말이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는 로널드 애런슨의‘사르트르와 카뮈’, 에릭 베르네르의‘폭력에서 전체주의로’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카뮈는‘섬’에 부쳐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펼쳐 놓은 책에서 한 개의 문장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 한 개의 어휘가 아직도 방안에서 울리고 있다.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그와 동시에 벌써 그 완벽한 언어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수줍고 더욱 어색한 하나의 노래가 존재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푸득거린다.”(1993년 민음사 刊, 장 그르니에 지음‘섬’8 페이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카뮈의 발문 중“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는 내가 글을 쓰며 지향하기 위해 마음에 두는 부분이다. 카뮈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말한다. 인상적인 것은 스승이라는 말의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되며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면 그 생명의 불이 꺼질 줄 모르며 서로 서로의 생애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대화라는 카뮈의 말이다. 물론 카뮈와 사르트르의 우정과 대립, 그르니에와 카뮈의 우정을 개인 차원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카뮈와 사르트르가 대립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진정한 혁명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소련에 폭력과 억압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이다.“미래의 휴머니즘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란 논쟁은 프랑스의 경우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 논쟁으로 전개되었고 카뮈는 반공산주의의 진영에,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진영의 선봉에 섰다. 그런데 에릭 베르네르가 착안(着眼)했듯 카뮈와 사르트르를 분기(分岐)하게 한 주요 요인은 철학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에릭 베르네르에 의하면 젊은 시절의 카뮈와 사르트르의 저작에서는 그 둘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유한성 문제와 그 이면에 자리한 존재 욕망, 절대에의 향수 등에 중점을 둔 카뮈의‘시지프 신화’와 사르트르의‘존재와 무’등 두 사람의 초기 저작에서 보이지 않던 차이는 카뮈의‘반항하는 인간’(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출간으로 인해 점점 크게 부각되었다. 카뮈와 사르트르를 대립하게 한 문제의식은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휴머니즘과 폭력’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 책에는 쾨슬러의 딜레마라는 내용의 글이 있다. 이 쾨슬러는‘한낮의 어둠‘의 작가인 아서 쾨슬러를 말한다. 내게 깊은 감명으로 다가온 소설 중 하나인 ’한낮의 어둠‘은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운 동지들이 혁명에 성공한 후 서로 죽이고 죽은 아이러니와,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한다는 진리를 담은 소설이다. 그런가 하면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나에게는 각별한 철학자이다.“순수한 의식이나 순수한 세계와 같은 순수한 고유성의 왕국”이“존재하지 않는”퐁티의 철학은“의식이 몸에 육화(肉化)되어 있듯 몸은 세계 속에서 세계화되어 있다.”(김형효 지음, 철학과 현실사 刊 ’메를로 - 뽕티와 애매성의 철학’126 페이지)는 구절을 통해 내게 어필하고 있다. 얼마 전 배달된 책 소개 소책자를 통해 알베르 카뮈의 일러스트‘이방인’출간 소식을 들었다.(2013년 1월 1일 출간) 그리고 카뮈와 동시대를 살았던‘분노하라‘의 저자인 스테판 에셀의 타계 소식도 들었다.(2013년 2월 26일) 에셀은 독일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와 유엔 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한 분이다.(그가 프랑스 국적을 얻은 것은 18세이다.) 프랑스에서만 200만권이 팔린 그의 ’분노하라‘는 나와도 인연(因緣)이 닿은 책이다.(Yes 24 선정 2011년의 책 리뷰 대회 2위, 2012년 3월 반디어워드 2위) 에셀의 핵심 전언(傳言)은 ’분노하라. 그러나 자신을 정복함과 동시에 타인들의 폭력성향도 정복하는 비폭력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실존적 인간관과 정당한 폭력에의 경도(傾倒)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셀과,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애도(哀悼)한다. * 장 그르니에: 1898 - 1971
* 알베르 카뮈: 1913 - 1960
* 장 폴 사르트르: 1905 - 1980
* 아서 쾨슬러: 1905 - 1983
* 스테판 에셀: 1917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