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다녀오고 분도출판사 다녀오고.. 공동체 생각을 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
어제 강남 나누리병원에 다녀왔다. 예약 시간인 2시 20분에 맞추어 당도해 엑스선 촬영을 하고 운동 처방을 받았다. 지난 1월 14일 동네 병원에서 엑스선 촬영을 했을 때는 연골이 닳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 결과는 달리 나온 것이다. 강남구청역에서 내려 병원을 갈 때도,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셔틀버스를 이용했는데 문제는 병원에서 매시각 정각과 30분에 병원에서 강남구청역을 향해 가는 차편과, 매시각 15분과 45분에 신사역으로 가는 차편이 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 45분에 (기다리지 않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사역 가는 차를 탔다. 약 처방전은 신사역 근처의 약국에 제출하기로 하고서..
그런데 병원 근처에 가야 약이 있다는 소리를 신사역 근처의 두 군데 약국에서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셔틀버스를 기다려 다시 병원 근처 약국에 가서 약을 조제하고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가 강남구청에 내리니 정상적으로 처음부터 병원 옆 약국에서 약을 지었을 경우에 비해 한 시간 정도가 지연되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그저께 서울 명동성당 내 분도출판사 분원에서 어머니가 사신 성무일도(聖務日禱) 책을 환불받기 위해 그곳으로 가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문의 결과 직원인지 수녀님인지 하는 분이 평소에는 일찍 문을 닫지 않는데 그날은 회사 일로 5시 30분에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셨다. 멀리서 일부러 왔으니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죄송하다며. 여섯시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강남구청역에서 5시 정도에 출발하면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 경비 아저씨에게 돈(25,000원)을 맡겨둘 테니 영수증과 책을 맞교환하도록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명동역 10번 출구로 나와 언덕길을 올랐는데 내가 그 옛날 S와 연극을 보던 삼일로 창고극장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그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처럼 도시의 서정(敍情)을 더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경비 아저씨를 만나 돈을 받고 나오는 길에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었다. 아쉬운 발길을 떼어놓은 것은 지난 생각 때문이었다. 명동에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왠지 옛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든 것은 왜일까?
오늘 박경철 원장의‘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다가 그리스 정교회 이야기 부분에서 아련한(대상없는) 향수와, 수도원 생활에 대한 뜬금없는 충동 같은 것을 느꼈다. 종교가 전해주는 안식과 평안의 그윽함을 동경(憧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에 분도출판사 분원에 가서 책을 살 생각을 하고 있다. 검색해 보니 분도출판사 책 가운데 카톨릭 신앙 서적 외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봉인된 시간’, 현경의‘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데싸우어의‘인간이란 무엇인가’, 에릭 스프링스티드의‘시몬느 베이유’, 케네스 첸의‘불교란 무엇인가’, 이수민의‘마니교’, 발터 니그의‘예언자적 사상가’(예전에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책) 등은 읽고 싶은 책이다.
마드렌 스코펠로의‘영지주의자들’, 뤼시앵 레뇨의‘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 안셀름 그륀의‘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 체험‘ 등은 나의 주된 관심사항을 담은 책이다. 뤼시앵 레뇨의‘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는‘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관심을 두게 된 책이다.“처음 로마 제국에서 일단의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가 경험한 황야의 고행을 몸소 체험하려는 것이었다.”(‘문명의 배꼽. 그리스’174 페이지) 발터 니그의‘예언자적 사상가’도 그렇지만 앨버트 놀런의‘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예전에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책: 2010년 새로 나옴)가 떠올리게 해준 옛 추억이 무겁게 느껴진다.
안셀름 그륀의‘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 체험‘은 바울에 대한 급진적 독법과 호교적(護敎的) 독법의 변증법적 지양이 될 책으로 보인다. 저자인 안셀름 그륀은 1945년 독일 뢴 융커하우젠에서 태어나 1964년 뷔르츠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바로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에 들어갔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상트 오틸리엔과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 체험‘은 목차가 우선 심상치 않다.
1. 바오로의 정신적.종교적 환경 아래에 스토아철학, 영지주의, 바리사이, 비교, 희생 제의 등이 정리되었고 2. 회심 체험, 3 예수 그리스도 체험 아래에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 모든 인간적 가치 기준의 전복,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 등이 정리되었고 4. 새 생명 체험 5. 소명 체험 6. 구원 체험 7. 신비 체험 8. 바오로와 심층심리학 아래에 바오로의 심리학, 바오로와 현대 심층심리학적 통찰, 신학적.신비적 언설에 대한 심층심리학적 해석 등이 정리되었고 9. 바오로와 여성, 10. 바오로와 성, 11. 바오로와 유다인, 12. 바오로와 종교 간 대화 등이다.
내게는 안셀름 그륀이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수도원 생활을 오래 한 것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내 경우 수도원 생활에 마음을 두는 것(충동적이고 일시적이겠지만)은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지향을 꼭 예수와 연결지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하려는 것이기에 예수 당시의 공동체 운동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수 당시의 공동체 운동은 당대의 지배체계에 대한 저항과 어긋냄일 뿐 아니라 가족주의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연대, 벡터로서의 희망이라는 김영민 교수의 지적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는‘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이런 말을 들려준다. (참다운 공동체는)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고, 서로 합심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고,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며, 서로 남의 짐을 져주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대접하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논의의 맥락이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존 카밧진이‘마음챙김 명상’의 서문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직접적 체험(명상)을 갈망하기도 하지만 실은 똑같은 이유로 명상에 관해 거리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공동체에 대한 정서(情緖) 역시 명상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닮은 데가 있어 보인다.
지난 해‘가족의 두 얼굴‘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공동체의 두 얼굴’ 같은 제목의 책은 없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이상한 관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곧 생각을 정리하면 그런 말은 너무 피상적이고 안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이지만 가족 이외의 공동체는 2차적이어서 으레 그러려니,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공동체 내에서 인식의 노동이 정서의 노동과 체계의 노동보다 웃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물론 이것이 곧‘허영’이라는 괴물의 탄생.”이라는 김영민 교수의 지적은 흥미롭고 날카롭다. 김영민 교수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인식, 정서, 체계의 노동이라는 3중의 짐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공동체라면) 관건은 소유와 공유를 바라보는 시각일 수 있다.“공동 소유의 역사는 역설적이다. 공동 소유의 제도와 사상이 덜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는 오히려 그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의, 우정, 구성원의 덕에 의지하는 공동체, 그리고 사유재산을 폐기하면 투쟁이 없어질 것이라 믿는 기대는 충돌하는 자아들과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장애에 부딪혀 사라지고 말았다.“는 루크 T. 존슨의 지적(‘공동소유: 미심쩍은 초대교회의 이상’174, 175 페이지)은 주목할 만하다. 고려할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물론 공동체를 지향 아니 그리는 자체는 순수하고 선적(善的)이다.
어제 다녀온 강남 논현동 나누리 병원 가까운 곳에 내가 지난 시절 참여했었던 미니 공동체가 두 군데 있었다. 학동역 근처의 한 곳, 양재역 근처의 한 곳...그 중 한 곳에서 가졌던 단기 출가 형식의 모임 마지막 날 나는 이진명 시인의‘고행자들의 밤 드높은 악기가 되어’를 암송했다.“숲에 먼동이 가까웠습니다/ 밤이슬에 젖은 고행자들/ 이마 들어/ 샛별을 마중합니다...아침 햇덩이는 그 말씀 안고 숲을 달려/ 맨발의 고행자들/ 세례의 강을 건너는 행렬 속으로/ 경(經)이 되고 행(行)이 되어 솟아오릅니다..”란 시.. 가끔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흔적만 남은 그곳을 가보곤 하는 것은 그리움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그리움일까? 시간, 공간, 아니면 모임. 어떤 것인가에 따라 내 읽기도, 마음씀도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