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가난...

문학 부업의 시대(문학을 부업으로 할 것을 고려하는 시대)에 시인의 부업에 대해 검색하는 것은 함민복 시인의 사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은 생전“나는 부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 유일의 시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타계 전까지 인사동에서 귀천(歸天)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던 아내 목순옥 여사를 염두에 둔 말이다. 新春 문예 당선자는 '辛春 고아'라는 기사에 의하면 소설가의 연 수입은 100만원이고 시인은 30만원도 안된다고 한다.(2007년 1월 14일 한국일보) 기사가 쓰인 시점이 2007년이니 6년이 지났지만 그런 현실이 별로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에 의하면 문인들은 주요 문예지를 제외하곤 원고료를 받는 대신 정기구독으로 대체되기 일쑤라고 한다.



‘공중 묘지’라는 시집을 낸 성윤석 시인은 지난 2004년부터 용미리 서울 시립묘지에서 묘지 관리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04년은‘공중 묘지’발간 3년 전이다. 그의 시집에 사자(死者)의 서(序), 개장(改葬), 공중 묘지(1 ~ 6), 용미리, 바람에게서 바람으로부터(”11월 묘지 사무소 앞은 쌓인 잎들이 바람에 쓸려 다닌다”로 시작하는), 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 등 묘지와 관계된 시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함민복 시인(1962 - )은 최근‘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란 시집을 냈다. 시인은 강화도 초지대교 부근에서 4년째 인삼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시인에게“아직도 가난을 팔아먹고 사냐?”같은 문자메시지가 날아들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시인은“나의 것이 정녕 가난일까, 더 가난한 이들에게 그것은 과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시인의 가난은 시 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보는 일은 안타깝다. 가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많지만 초정(楚亭) 박제가, 간서치(看書癡)로 유명한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의 가난 타령은 매우 주관적이었다. 더구나 이덕무처럼 글이라도 남길 수 있었던 사람은 상위 10 ~ 20 퍼센트에 드는 상류층이었다. 임용한 사학자는‘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에서“간서치란 표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극빈의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도 순수한 지식과 학문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이덕무의 모습을 그리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을 들려준다.(70 페이지) 중상(中上)의 생활이 가능한 경제력을 가졌음에도 책과 공부와 술값을 위해 가족의 삶을 희생하고 중하(中下)의 생활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반면 가난은 소홀히 대해지기도 한다. 2004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황인숙 시인은 이런 수상 소감을 밝혔다.“내게도 생전의 김수영선생과 닮은 데가 있다. 일상적 고민의 반 정도는 돈 문제라는 것. 약간의 물질적 보상에 문득 우화등선하는 느낌이다.”과연 시인의 작품 가운데“누군가 불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이라는‘지극히 속된 기도‘라는 시가 있다. 당시 나는 가난이라는 말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고, 가난이라는 말이 쓰였다 해도 그 말의 뉘앙스가 다양할 것이기에 ’지극히 속된 기도‘와 수상 소감을 접했음에도 시인과 가난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었다.



시인의 재부(財富) 상태를 평가할 때 부업 여부를 들어야겠지만 가령 대학교 교수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승희 시인과 서동욱 시인 같은 경우를 부업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가난이란 말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만큼 부업이란 말 역시 그렇지 않은가. 성윤석 시인은“나는 몇 번이나 공동묘지 속에 파묻힐 만했고/ 예초기에 목이 몇 번 달아날 만했고/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져/ 아무도 오지 않는 산장에 흩뿌려질 만했다..”란 ’용미리‘란 시를 썼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나는 가난을 연상하지 않았다.



하지만“처음엔 무언가가 귓속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왜 환한 달은 양철 지붕 위에서만 아름다운가./ 달빛이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처음에 병은 설레이게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 사실 나는 가난을 좋아한 것이었다. 부족하고/ 외로운 일들을 쫓아다녔던 것이었다..”란 ’스스로를 치다‘란 시를 읽으며 비로소(?) 가난과 병고(病苦)와 고독(孤獨)을 인정(認定)하고 수용(受容)했다. 가난, 병고, 고독은 삼위일체인지도 모른다. 귀신을 보는 병이라 불리는 이석증(耳石症)에 시달리고 있다는 시인의 근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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