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살아볼까]서울 나들이(3)
나이탓인지 섬의 환경이 낯설었는지 섬살이 2년동안 병원 입원이 벌써 4번째이다.
처음에는 숨이 너무 가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증상때문에 이러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숨을 놓는게 아닌가
겁이나서 바로 서울로 올라와 뇌MRI를 찍고 심전도 검사를 했더니 우려했던 뇌졸중이나 심장병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습기가 많고 후덥지근한 섬의 여름날씨가 버겁기도 했거니와 호기롭게 시작했던 장사는 섬사람들의 텃세인지
솜씨가 없어서인지 지지부진하고 마음을 열지않고 수근거리는 사람들때문에 상처를 받았던게 원인이 되어 홧병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싶다.
처방 받아온 약들을 보니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들인지라 서울내기의 섬살이에 첫번째 도전에서는 완패를 한 기분이었다.
그뒤로도 조금씩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었다.
거기다 집을 짓느라 이웃과의 갈등이 빚어져 증상이 더 심해지고 술만 늘었다.
올해초 갑자기 왼손 손가락이 마치 동상이 걸린 것처럼 감각이 무뎌지고 힘이 빠지더니 남비도 제대로 들지 못하겠고
문손잡이도 돌리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지난번 증상이 드디어 병증으로 나타나 반신불수가 되는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났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에도 이런 병들이 나타난다는데 남은 생을 자식들에게 폐만 끼치고 장애자로 사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일시적인 증상일까 싶어 2주정도 버텨봤지만 점점 마비 부위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 진료를 했던 병원에 진료예약을 해놓고 서울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늙느라 그런 것인지 섬이 나를 밀어내는 것인지 어수선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내가 하고 싶은일 하면서
쉬고 싶었는데 이런 초심이 자꾸 흔들리고 운동부족으로 늘어나는 살만큼 의구심도 자꾸 늘어만 갔다.
신경외과에서 시작된 검사는 정형외과로 옮겨지고 세브란스병원으로 다시 검사의뢰가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병이길래 확진이 어려운 것인지 겁이났다. 처음에는 척추나 손목쪽에 문제가 있을것이라는 의사소견과는 다르게
근전도검사에서는 팔꿈치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온 것이다.
그 사이 너무 급작스럽게 나빠진데다 마비부위가 광범위해서 혹시나 면역질환이 의심되어 세밀한 혈액검사도 진행되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았다. 둘째녀석이 아직 어린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수명이야 제각각 타고 났을터
아둥바둥 한다고 더 살일도 없을테고 그저 살면서 의식없이 목숨만 유지한다든가 하는 비극이 없기만을 바랄뿐이었다.
이러저러 확정된 병명은 '반발성 척골 신경마비'
팔꿈치쪽의 엘보 어딘가에 이상이 생겨 눌린신경을 터주는 수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큰수술은 아니지만 병명을 알아내는데 오랜시간이 걸리다보니 혹시라도 오진이거나 까다로운병이아닐까 싶어 내심 불안했다.
결국 수술을 받고 한 일주일정도 치료를 받기위해 입원중이다.
몇번의 수술을 경험한 나는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중환자가 된 기분이다.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심란한 표정이나 환자들의 부스스한 모습들.
그리고 병원을 떠도는 것같은 병균이나 죽음의 그림자들이 몸과 마음을 짓누른다.
병원비를 생각하면 다인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돋떼기시장같은 다인실에서는 가뜩이나 예민한 내신경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고
허리와 무릎치료로 유명한 이병원은 장기입원환자가 많아 다인실은 비기가 무섭게 대기자가 채운다니 천상 특실이나 2인실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늙어가면서 그나마 좋아진건 병원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환자들이 먹었을 식기도 께름직하고 무거운공기에 떠돌 뭔가가 영 개운치 않아 예전에는 집에서 밥을 지어 날라먹곤 했는데
이제는 연로하신 엄마에게 부탁을 드릴 수도 없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유난이다 싶어 맛도 없는 병원식과 그럭저럭 화해를
하고 입맛과 타협을 했다.
밑반찬이라도 해올까 하는 딸내미의 마음이 갸륵했지만 밥도 간신히 해먹는 아이에게 무슨 고생인가 싶어 만류를 했다.
병실마다 친정엄마 또래의 노인들이 그득한데 노쇠한 노모는 마흔넘은 막내딸이 고관절 수술을 해서 노구를 끌고 청주까지
간병을 갔고 그 사이에도 나는 몇번의 입원으로 엄마의 간병을 받았던 불효녀인지라 혹시 노모가 놀랄까 몰래 입원하고
수술하는 마음으로나 미안함을 대신할까.
'그저 건강이 최고다, 계원중에 하나는 두 딸이 모두 암이란다'
그러고보니 어린시절 같은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아주머니 딸도 몇년전 간암을 세상을 떠난일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나이보다도 젊었던 언니는 친언니처럼 여겼었기에 술도 먹지 않는 사람이 왜 간암인가 싶어 놀랐었다.
그집아저씨도 간암으로 가시고 아들도 간이 안좋아 고생이라는걸 보면 유전적 질환이지싶다.
서른살에 세상을 놓친 외아들 때문인지 노모는 자식들의 건강이 늘 걱정이다, 혹시나 당신보다 또 먼저 앞서지는 않을까.
맏자식이면서 남편이기도하고 죽은 외아들같기도 하다는 나는 저혼자 살아보겠다고 훌쩍 섬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노모는
바람만 불어도 전화통을 붙들고 노심초사요, 잘 보여주지도 않는 딸의 얼굴이 그리워 걸핏하면 눈물바람이시라는데
잠시 쉬면 돌어오겠거니 했던 자식은 집까지 지어놓고 올라올 생각이 없으니 허전함이야 어찌 말로 다할까.
섬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은 지불해야할 댓가도 많은셈이다.
춥고 지긋지긋하게 눈도 많이 왔다는 서울은 우연히도 내가 올적마다 푸근하다.
그래도 서울내기라고 봐주는 모양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