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기...
김애령의‘여성, 타자의 은유‘(그린비 출판사)를 읽은 것은 올 5월이다. 이 책이 속한 사이 시리즈의 다른 책 가운데 마음만 가졌을 뿐 읽지 못한 책이 조윤경의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이다. 텍스트를 보고 이미지를 읽는다는 표현이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연상하게 한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물론 음악을 미술처럼 보고, 미술을 음악처럼 듣는다고 표현하지 않았으니 구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건축을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본다는 표현이 깊은 역설적 뜻이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책은 건축 서적 읽기에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야 나는 서윤영의 몇몇 작품들과 후나세 슌스케의 ’콘크리트의 역습‘을 통해 본격적으로 건축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콘크리트의 역습‘에 의하면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제자 안도 다다오가 콘크리트가 확산되는 데 큰 몫을 했다. 건축의 문명사적 의미를 밝혀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한가?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는 습성대로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지 않았다.
그런데 서현이‘배흘림기둥의 고백’이란 책에 배흘림 기둥에 대한 해석을 바로잡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고 있어 흥미를 돋운다. 우선 서현의 ’또 한 권의 벽돌‘을 주문했다. 이 책은 벽돌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건축에 대한 책이라 생각할 법 하지만 또 한 권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서평집이다. 배흘림기둥의 기능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두께가 일정한 기둥의 경우 중간 부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었다. 아니 유일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자는 나무기둥 아래에 받쳐 놓은 돌인 주초(柱礎)에 진짜 비밀이 있지 않을까 추리한다. 나무기둥 너비에 맞는 돌을 찾아내 다듬는 것보단 돌 크기에 맞춰 나무 밑둥을 갸름하게 깎는 쪽이 목수의 입장에서 더 쉬웠을 거라는 판단이다. 나는 책을 꼼꼼하게 읽느라고 읽지만 어떤 때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그런 실상은 지난 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했는데 이 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 해 난감함을 느낀 그대로이다. 정교한 읽기, 언제나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