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해와 큰 오해...
어제 주보(週報)에서 면구라는 단어를 보았다. 그런데 괄호 안에 든 한문은 面懼가 아닌 面灸였다. 면구란 다름 아닌 남을 마주 대하기 부끄럽다는 뜻이다. 송구(悚懼)와 면구를 부끄러움을 뜻하는 유사한 단어로 알고 있던 나는 당연히(?) 면구를 면구(面懼)라 생각하고 사전을 찾아 보았지만 구(懼)는 송구(悚懼)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두려워 할 구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론을 말하면 면구는 面懼가 아닌 面灸라야 옳다. 물론 송구(悚懼)는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거북하다는 뜻이다. 면구(面灸)에 쓰인 구(灸)는 뜸뜰 구 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 단어이다. 부끄러운 것을 뜸을 뜰 때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으로 비유해 표현하는 것일까?
가지 노부유끼(加地伸行)는 <유교란 무엇인가>의 책머리에서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이 침상에 있을 때는 주검(시신:屍身)이라 하고 관에 넣은 후에는 널빤지<구:柩>라 하는데 현대 일본어에서는 관(棺)과 널<柩>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 운구는 몸 구(軀)자가 들어가는 운구(運軀)가 아니라 널 또는 널빤지를 뜻하는 구(柩)가 들어가는 운구(運柩)인 것이다.
가지 노부유끼는 유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라 말했다. 그제 불교방송을 통해 본 각묵스님의 ‘초기 불교‘ 두 번째 강의에서도 오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불교가 내세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지난 2003년 홍제동에서 아비담마 강의를 통해 직접 뵈었을 때처럼 음성, 모습 모두 건강하신 모습이셨다.
오해에도 작은 오해와 큰 오해가 있다. 단어 하나를 잘못 아는 것이 작은 오해라면, 유교가 죽음에 대해 논하지 않고 불교가 내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등은 큰 오해이다. 오래 전 나는 만년의 칼 융이 신을 믿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을 믿지 않고 안다고 말했다는 짧은 인용문을 읽었다. 당시 나는 신을 안다니 얼마나 멋진가,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칼 융의 본 뜻이 “뭔가 진실이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실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믿는다’는 말을 씁니다. 그렇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아요. 난 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라는 말 속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칼 융 자서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칼 융에 대한 내 생각은 오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