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가 오늘날의 역사학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 100년 가까이 실증사학의 굴레를 맴돌며 고대사를 굳이 대동강 가에 묶어두려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도를 보고, 분기탱천하여 『조선상고사』의 후속작을 하나 썼을 것이다. 이 책『어원상고사』는 『조선상고사』에서 시도한 어원의 문제를 파고들어, 한국 고대사를 완전히 새롭게 보여주는 책이다. 『조선상고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고대사의 언어도 훌륭한 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강조한다. 『조선상고사』 이후 언어를 버린 역사학에 올바른 유물로 언어를 돌려주려는 시도이다.
목차없음.
196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중고등 국어교사로 40여년 재직하였다. 일찍이 활쏘기, 전통의학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쏘기 분야 최초로 국궁 안내서 등을 쓴 바 있으며, 인류가 풀어야 할 숙원인 건강에 대해 누구나 올바른 정보를 알기 쉽게 배울 수 있는 침뜸학에 관한 책과 동양의학 안내서 여러 권을 펴냈다. 또한 청소년들을 위해 우리 생활 속에 깃든 철학의 문제들, 시 창작/감상 방법, 그리고 시집 등을 펴냈다. 현재는 역사언어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 집필하고 있다.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 밝혀낸 우리 역사 단재 신채호가 오늘날의 역사학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 100년 가까이 실증사학의 굴레를 맴돌며 고대사를 굳이 대동강 가에 묶어두려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도를 보고, 분기탱천하여 『조선상고사』의 후속작을 하나 썼을 것이다. 이 책『어원상고사』는 『조선상고사』에서 시도한 어원의 문제를 파고들어, 한국 고대사를 완전히 새롭게 보여주는 책이다. 고대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국명, 인명, 지명, 관직명, 부족명이 나온다. 이런 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역사학의 몫이 아니다. 국어학의 몫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은 올바른 역사 해석을 위하여 국어학에 부탁하여야 한다. 하지만 역사학에서는 국어학에서 이미 이루어놓은 위대한 성과들마저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리고 소박한 민간어원설 수준에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고유명사를 설명한다. 그런 설명이 맞을 리 없으니, 대부분 오해가 또 다른 오해 위에 얹혀 망상에 이르기 일쑤이다. 방법론이 없는 어원 분석은 암담하고 위험하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는 2000년이 넘는다. 그 긴 시간 동안 언어는 변했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기록으로 전하는 말들의 어원을 파헤쳐보면 각 왕조에서 쓰는 언어는 서로 달랐음이 드러난다. 단군조선은 퉁구스어를 썼고, 기자조선은 몽골어를 썼으며, 위만조선은 터키어를 썼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리야트족으로, 고구려는 부리야트어의 한 갈래인 코리 방언을 썼고, 백제는 쿠다라 방언을 썼다. 신라는 초기에는 퉁구스어를 쓰다가 나중에는 흉노의 지배층과 같은 언어인 터키어를 쓴다. 물론 지배층의 얘기이다. 이들이 다스리던 동북아 초원지대와 한반도에는 길략어와 아이누어를 쓰는 사람들이 퍼져 살았다. 이들 언어가 용광로처럼 들끓던 곳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며 빚어진 말이 한국어이다. 우리 역사의 왕조들이 쓴 궁중 언어에는 몽골어의 자취가 많이 남았다. 언뜻 보면 원나라의 지배 풍속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연원이 훨씬 더 깊다. 고구려의 지배층 언어가 몽골어였기에 그 뒤로 왕실 언어는 몽골어로 이어져 조선왕조까지 그렇게 쓴 것이다. 주몽은 고구려의 계루부 출신이다. 계루는 부리야트의 한 부족 이름 ‘코리(qori)’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이것은 다시 구리(句麗), 고리(藁離)로도 적힌다. 이 말은 오랜 세월 왕족을 배출한 부족이기에 우리말에서 아예 혈통이나 왕족을 뜻하는 말로 자리 잡는다. 피붙이를 뜻하는 말은 ‘겨레, 갈래’이고, 용을 뜻하는 우리말은 ‘가리’인데, 이것이 코리에서 기원한 말이다. 이들은 고려 때까지 왕족의 혈통을 스스로 ‘친(金, čin)’이라고 불렀다. ‘čin’을 한자음으로 적어서 나라 이름으로 쓰면 ‘금(金), 청(淸), 진(震), 진(秦)’이다. 진나라도 금나라도 청나라도 발해(震)도 모두 이들의 혈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고대의 언어는 일관된 음운변화를 통해 일정한 뜻을 함축한다. 『어원상고사』는 옛 기록에 나타나는 이러한 말들을 추적하여 어떤 뜻인지를 밝혀낸다. 그리고 그 말이 쓰인 역사상의 어떤 사건과 결부 지으면, 당시의 사건과 상황이 한결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예컨대 당나라가 지척의 고구려와 백제를 제치고 한반도 구석에 위치한 신라와 결탁한 사태의 뒤에는 당시 정치 상황의 불가피성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당나라와 신라의 왕실이 터키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나당연합의 정황은 한결 또렷해진다. 단군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 알고, 기자가 어떤 언어를 썼는지 안다면, 당시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한결 또렷해진다. 심지어 왕조교체의 정황도 언어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이상을 보면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언어는 유적이나 유물 못지않게 중요한 고고학 자료이다. 한국의 고대사는 그렇잖아도 유물이나 유적이 적어 사건 간의 고리를 연결하기 힘든데, 중요한 언어를 굳이 도외시한다면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런 점을 근대사에서 가장 먼저 이해하고 접근한 사람이 단재 신채호이다. 그가 쓴 『조선상고사』를 보면 언어까지 파고들어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 책『어원상고사』는 『조선상고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고대사의 언어도 훌륭한 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강조한다. 『조선상고사』 이후 언어를 버린 역사학에 올바른 유물로 언어를 돌려주려는 시도이다. ●역사언어학 서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한문의 문장 독법으로는 해독되지 않는 문단이 14군데 있습니다. 한문에 정통한 사람들도 풀이할 수 없어서 지난 1,000년 동안 까막 글씨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처음으로 해석한 사람이 일본학자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일이죠. 왜 일본인이 이것을 번역했을까요? 이 문장을 한문식이 아닌 일본어 식으로 풀어본 겁니다. 그랬더니 뜻이 조금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충격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자칭 ‘국보 1호’라고 떠들고 다닌 양주동이었습니다. 양주동은 관련 서적을 한 지게 지고 골방에 처박혀 일본 학자가 했던 그 방식으로 까막 글씨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책을 내죠. 『고가 연구』. 1,000년 동안 잠자던 향가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국어를 전공했기에 향가를 전문가 수준으로 배웠습니다. 우리말의 소리가 문자화할 때 빚어지는 고민과 난처함이 향찰 표기에 잘 드러났습니다. 이 향찰 표기는 우리의 생각을 전하는 데 끝내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식 표기로 정착합니다. 우리는 15세기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나타날 때까지 한문 원문을 표기 수단으로 삼습니다. 자연스럽게 향찰 표기가 우리 겨레의 기억에서 멀어졌고, 옛 조상들이 쓰던 『삼국유사』의 문장을 알아보지 못한 상황이 된 것이죠. 그것이 향찰 풀이 과정에서 드러난 소동이었습니다. 제가 국어를 전공으로 배우면서 한가지 이상하게 느낀 게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펼치면, 뜻을 알 수 없는 국명과 지명과 인명이 가득합니다. 그 속의 글을 읽으려면 이 이름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알 수 없죠. 그 이름을 쓴 사람들이 무슨 뜻이라고 밝힌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마치 향가 문장을 마주한 옛사람들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상한 건 역사학자 중 아무도 양주동의 노릇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상합니다. 더 이상한 건, 이미 많은 연구를 해놓은 언어학자들에게 묻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개똥철학으로 주먹구구식 해석을 시도합니다. 이병도가 주석을 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펼쳐보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21년 경성京城에 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이병도의 각주) 그 이름은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취하였다기보다는 「검(城)」 또는 「임금(城)」(王城)의 뜻이 아닌가 한다. 이병도는 金을 우리말 ‘검’을 적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눈에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임금의 ‘검’을 한자로 적으려면, ‘儉, 險’을 써야 합니다. 향찰 표기의 원칙이고, 실제로 단군왕검이 그 한자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곳 ‘금성’의 金은 임금이나 신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황금을 만주어로는 ‘asin’, 몽골어로는 ‘alta’, 터키어로는 ‘altin’ 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누군가 金이라는 기록을 남겼다면 그 들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수도는 중앙에 있습니다. 중앙을 뜻하는 터키어는 ‘orta’이고 ‘목책을 쌓은 성’은 ‘tura’입니다. 터키어를 쓰 는 사람들이 ‘올타두라(orta - tura)=나라의 중심 수도’라고 부른 동 네를 몽골어를 쓰는 사람들은 ‘알타다라(alta-dara)=황금의 성’라고 듣고 한자로 ‘金城’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1,000년 전의 김부식이 적 은, 2,000년 전의 언어를, 이병도는 지금의 언어로 풀이하였으니, 그 게 맞을 리가 없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의 자뻑(!)이 이와 같습니다. 그의 주석서에 이런 혀 짧은 소견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황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잡는 수도 있습니다. 아사달에 대한 해설이 그것이죠. 일본어로 ‘아사’는 아침(朝)인데, 고 조선의 수도 ‘아사달’이 바로 아침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朝鮮=아사달’이라는 거죠. 바로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주장은 아사달에 관한 많은 의견 중에서 제법 그럴 듯한 주장이어서 역사학계의 주요 의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언어학을 전공한 저의 눈에는 아주 소박한 소꿉장난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병도의 주장 중에서는 그나 마 그럴듯한 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한국어는 보통 우랄-알타이어에 속한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우랄’을 떼어버리고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했습니다. 알타이어족을 대표하는 말은 터키어 몽골어 퉁구스어인데, 한국어는 이들보다 훨씬 더 일찍 갈라져 나와서 이들과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기문을 비롯한 서울대 학파 의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이 가정한 ‘원시부여어’ ‘원시 한어’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공의 언어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어와 알타이 조어를 연결하는 중간 과정을 상정하여 생각해본 상상 속의 언어죠.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학설이 등장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알타 이 제어는 1만 년 전 요동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어떤 이유 로 이동하면서 퍼진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 언어의 근거지는 중국 동 북부의 홍산과 몽골의 적봉 지역인데, 지금 이곳은 나무 하나 없이 잔풀만 자라는 황량한 땅이어서 여기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1만 년 전의 기후로는 이 지역이 농사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소빙하기가 오면서 날씨 가 추워져서 지금과 같은 황량한 땅으로 변했고, 그 바람에 그곳 원 주민들이 농사짓기 좋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언어도 지금처럼 퍼졌 다는 주장입니다. 그곳보다 더 따뜻한 지역은, 대체로 발해만과 황해 의 주변입니다. 이른바 동이족의 영역이죠. 홍산 문화는 농경을 일찍 시작한 동이족 조상의 문화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그곳 황량해진 땅에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초원지대에 남은 사람들은 짐승을 길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 원전 3,000년쯤에 이르면 말을 사육하는 데 성공합니다. 말을 사육 했다는 것은 대규모 이동과 집단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상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흉노족이죠. 말과 함께 나타나 농경지를 휩쓸며 약탈하는 사람들이 철 따라 중국의 변경을 넘나듭니다. 이들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서서히 기록에 나타나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면 변방의 골칫거리로 등장합니다. 바로 이들의 발상지가 알타이산맥과 인근 초원이고, 이들의 언어가 바로 알타이어족입니다. 알타이란 황금산金山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국어는 이들의 언어와 비슷하지만, 이들 언어 간의 통일성과 유사성보다 좀 더 낯선 모습입니다. 이들보다 훨씬 더 일찍 알타이 조어祖語로부터 분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선 최근 학설로 보면 1만 년 전에 홍산을 떠난 원주민의 언어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몰랐던 람스테드Ramstedt(1873~1950)나 그를 따르는 학자들이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에 집어넣어서 설명하다 보니, 앞서 본 원시 부여어나 원시 한어를 쓰는 ‘고아시아족의 언어’를 중간단계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자 표기로 남은 중국 발해만 지역의 지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몽골어 터키어 퉁구스어와 비교할 때도 어떤 공통성을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입말(口語)과 직접 대비할 때 뜻이 더욱 또렷해지는 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5개 언어를 비교해야만 고대사에 등장하는 지명 인명 국명이 좀 더 또렷한 뜻을 드러냅니다. 저는 역사에 문외한입니다. 스무 살 무렵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문공사)를 읽어본 것이 전부입니다. 국어를 전공하면서 역사로부터 멀어졌는데, 어원을 정리하다 보니 젊은 날 읽은 신채호가 다시 생각나서 그 꼬투리들을 정리해보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연재를 하려고 마음먹고 보니,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이가 노망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해봅니다. 이제 시작하는 연재는 역사에 문외한인 한 문학도의 눈에 비친 풍경이니, 설령 제가 틀린다고 해도 저로서는 부끄러울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역사학도들께서는 때로 못마땅하시겠으나, 제가 그것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못마땅하시거든 한 늙은이의 망령이라고 치부하시고 눈을 돌려 자위하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고대의 언어는 가장 확실한 고고학 자료입니다. 출토되는 유물보다 더 확실한 ‘뜻’을 보여줍니다. 저는 언어학에 담긴 역사의 지분을 건드리는 것뿐입니다. 가장 확실한 고고학 자료를 건드리지 않는 고고학자들이 더 이상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