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한 멜모스』와 『아듀』는 소문이 자자한 이야기꾼 발자크의 참모습이 궁금한 독자에게 추천할 수 있는 흥미로운 중편소설로, ‘현실 재현’의 문제를 밀도 높게 다룬 작품들이다. 발자크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 단지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님을, 그러한 욕망 자체가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실주의자’ ‘관찰자’를 넘어서 ‘환상가’ ‘통찰자’ ‘환시자’로 불리게 될 시발점의 작품 『회개한 멜모스』와 실물의 직접적 재현을 통해 리얼리즘의 정수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주목받은 『아듀』, 2편의 중편이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현실과 환상의 조화, 악마, 돈, 사랑, 스펙터클한 세상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발자크가 천착한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목차없음.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투르(Tours)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발자크의 모친은 자녀에게 무심한 편이어서 낳자마자 아들을 유모의 집에서 기르게 했고, 이어서 그를 오라토리오회 수도원 기숙학교에 넣고서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유년기를 보낸 이 시절의 외로움과 슬픔은 그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에 잘 나타나 있다. 1814년 가족이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발자크는 파리에서 학업을 이어 가게 된다. 그는 법학 공부를 하는 이외에 소송 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소의 수습 서기로 일하면서 법률 실무를 익힌다. 이 시기에 얻은 법률 지식과 경험은 이후 그의 소설 창작의 밑거름이 되어 《인간 희극》에서는 법률문제와 관련한 많은 사건이 등장하며 풍부한 법률 지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1819년 발자크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파리의 비좁은 다락방에 갇혀 지내며 문학 습작하는 생활에 전념한다. 첫 작품은 운문 비극 〈크롬웰〉이었고, 이후 몇몇 소설들을 발표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친구들과 공동 작업으로 당시 유행하던 모험 소설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1825년 문학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발자크는 사업에 뛰어들어 재정적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출판사와 인쇄 및 활자 제조소 운영으로 이어지는 발자크의 사업은 2년 만에 실패로 끝났고 발자크는 파산에 이르러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다. 이후 문학의 길로 되돌아 왔으나 그는 평생 빚에 쫓기면서 돈을 벌기 위해 소설을 써야 하는 고달픈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이후 《인간 희극》에 포함된 《마지막 올빼미당원(Le Dernier Chouan)》이 1829년 발표되면서 발자크의 작품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이해에 나온 《결혼 생리학(La Physiologie du mariage)》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으며 호응을 얻었다. 1830년부터는 파리의 여러 살롱을 다니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했다. 1833년부터 1835년에 이르는 동안 발자크는 소설가로서 당시 낭만주의 문학을 벗어나 자신의 확고한 창작 세계를 형성한다. 이 시기에 《고리오 영감(Le Pere Goriot)》을 비롯해 《외제니 그랑데(Eugenie Grandet)》, 《루이 랑베르(Louis Lambert)》, 《세라피타(Seraphita)》 등 많은 소설이 발표되었다. 발자크는 앞선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을 재등장시키는 독특한 기법을 《고리오 영감》에서 처음 시도한 이후 이 기법을 계속 사용하면서 자신이 이미 쓴 작품들과 앞으로 쓸 작품들을 연계해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완성할 계획을 했다. 1841년 이 총서의 제목을 《인간 희극》으로 정하고 첫 권에 서문(Avant-Propos)을 붙여 소설에 대한 자신의 개념과 작품들이 이어지는 원칙을 밝힌다. 그러나 애초에 130여 편의 소설들로 구상했던 작품집은 1850년 발자크가 서거하면서 미완성으로 남겨진다. 한편 발자크의 건강은 과도한 집필 활동과 재정적 압박으로 인해 차츰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1850년 1월 결혼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머물고 있던 발자크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해 3월 결혼식을 올리고 5월 우크라이나를 떠나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혼집에 도착한 뒤 발자크는 더 이상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3개월 만에 숨을 거둔다.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되던 19세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비견될 만한 ‘돈’의 시대였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바로 이와 같은 ‘돈’의 시대를 증언하는 리얼리즘의 선구자였다. 1789년 대혁명으로 왕과 귀족과 교회의 특권을 철폐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을 만든 프랑스이지만, 19세기는 혁명의 시대와 동시에 인간보다 ‘돈’을 더 중요한 가치로 삼는 부르주아지의 시대이기도 하다. 19세기 초중반의 프랑스 사회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인간극』 시리즈의 일부를 이루는 중편소설 『회계한 멜모스』와 『아듀』는 돈의 시대에 대한 신랄한 발자크의 통찰을 비교적 짧은 분량의 소설 속에서 음미할 기회를 제공한다. 『회계한 멜모스』에서는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사들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신화는 발자크에게는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다. 악마에게 돈을 받고 기꺼이 영혼을 팔고자 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19세기 파리, 그것도 특별히 증권거래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자본주의 속에 사는 인간 영혼을 파헤치고 있다. 『아듀』는 재현이라는 미학의 문제를 다룬다. 주인공 필리프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퇴시 ‘베레지나’ 도하작전에서 헤어진 옛 여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도하작전을 재현하는 장면을 물적으로 연출한다. 19세기 대형 스펙터클쇼 파노라마를 연상시키는 이 같은 설정은 현대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를 연상시킨다. 리얼리즘의 아버지 발자크의 중편을 통해 독자는 돈이 지배하는, 스펙터클의 세계가 단지 19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