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수필집. 김정수의 글은 가족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가 자기 일생을 통해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한 것은 가족이라는 텍스트를 통한 '인류학'이다. 그는 가족이 다 떠나고 이제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 밥상에는 떠난 가족 모두가 다 와서 둘러앉은 듯하기 때문에 항상 정성을 들여 차린다는 것이다.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었다.
004 김종완 추천사
018 책머리에
1부
026 내 최초의 신세계
032 용기
038 봄비
043 튀기? 아이노꼬?
049 눈썹
053 그를 떠나다
062 책속에서 다시 만난 마 기자
2부
070 선택이 운명이다
077 황금숲
082 누가 이 삼복더위에 애를 낳았나
088 거룩한 밥상
093 왕을 모셔라
100 나의 꽃밭
105 청색 수국
3부
112 뒤늦은 손님
120 인도로 떠나다
127 노래 부르고 싶은 병
132 꿈
137 숲을 떠나며
4부
144 소년과 병아리
151 성림이 이야기
162 겁 없는 질문
168 딸의 웨딩드레스
174 커튼
180 고마워요, 김 병장님
189 봄은 벌써 저만치 오고 있다
5부
196 나의 아버지
209 아버지의 약방
214 약속
217 비겁한 효도
224 기대와 상처의 상관관계
231 시간의 작품
6부
238 포옹
243 선물
249 민들레언니
255 고백
260 때가 된 것이다
김정수론
266 조정은 | 가족이라는 텍스트
290 이관희 | 창작, 창작적인 에세이
294 김선희 |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에 대한 깊은 의식
충청남도 온양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은 언제부턴가 그 이름조차 아산이라고 바뀌었지만 내겐 여전히 ‘다사로운 빛고을’ 온양이다. 그곳을 떠나온 것은 열여섯 살의 봄. 내 생의 4분의 1을 그곳에서 지냈을 뿐인데 여전히 내 뿌리는 그곳으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끌어올린다. 결혼하여 들어간 시댁은 남양주였으니 이곳 또한 풀어보면 ‘남쪽 빛고을’이 된다. 남양주에선 7년을 살고 서울로 분가하였지만 이후 수십 년 동안 마치 출퇴근하듯 그곳을 오갔다. 나는 향일성 식물임에 틀림없다. 내 생은 온통 빛과 볕을 향해 있었다. 1992년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다. 등단하고 줄곧 글을 쓰지 않았다. 구태여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은 썼다. 글을 쓰는 동안 지나온 생과 앞에 놓인 생이 조금 더 맑아지고 조금 더 싱싱해지는 듯했다. 글쓰기도 내겐 햇살과 같다.
김정수의 글은 가족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가 자기 일생을 통해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한 것은 가족이라는 텍스트를 통한 ‘인류학’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가장 근원적인 생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영원한 문학의 주제일 것임에 틀림없다. 21세기의 특질 중 하나가 가족해체의 위기다. 지구촌 사람들은 점차 종족보존의 의지가 꺾이고 있다. 지구상의 어떤 생태계에서도 일어난 적 없는 종족보존의 회피가 인간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전체인구 중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다는 프랑스는 인구의 절반이 독신이고, 스웨덴이 47%, 독일은 40%, 우리나라는 27%를 넘어섰다. 얼마 안 가 우리는 더 이상 가족이나 집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김정수의 수필은 기꺼이 아니 고통스런 즐김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요구에 순응해온 마지막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가족이 다 떠나고 이제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 밥상에는 떠난 가족 모두가 다 와서 둘러앉은 듯하기 때문에 항상 정성을 들여 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19세기 말 해월이 고행 끝에 도달한 향아설위(向我設位)가 아니고 무엇인가. 해월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네 글자로 ‘네가 공경하는 귀신이 바로 너고 네가 바로 하늘님’이라는 혁명적 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랜 전통을 일도양단하면서 실존적 자각을 분명하게 일깨운 해월의 목소리가 김정수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실로 드러난다. 놀라운 일이다.
진정한 문학이란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익숙한 것의 편안함으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낯섦과 대면하는 것이다. 김정수라는 인물은 익숙하면서도 무척이나 낯설다.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에서 우리 전 세대 여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했다면 김정수는 신경숙의 글에 등장하는 어머니 본인의 진술과도 같다. 이는 저 프랑스의 ‘아니 에르너’와 같이 정직한 목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로써 한국문학에 다른 차원을 여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