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파시즘 체제를 반성하는 일본의 작은 물결
일본 제국주의가 국제사회에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로 낳은,
14년 역사에 이름을 남긴 괴뢰국가 ‘만주국’의 탄생과 자멸
중국의 동북에 위치한 만주는 청일·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 아래 침략전쟁을 수행하여 종당에는 대륙 진출이라는 거대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조그마한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본국과도 멀리 떨어진 중국 동북(만주)에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만주)에 만주국을 건국할 당시 외형상으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하게 하고, 구 군벌의 군인과 관료를 기용하는 등 독립국의 모습을 취하게 했지만, 동북(만주)은 일본 영토에 물자, 노동력, 자원을 공급하는 생명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은 오로지 자국의 국내 산업에 자원을 공급하고,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소련에 대응한 군사기지를 만들고,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 만주국을 철저히 이용하고 침탈했던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의 다른 식민지 국가 지배형식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기형적인 형태를 가진 식민지 유형의 하나였다.
이 글은 일본이 어떻게 서구 열강들의 눈을 피해 동북(만주)을 조용히 잠식하기 시작하였고, 어떻게 만주의 자원, 농산물, 인력 등을 계획적으로 취탈하였는지를 철저한 사료의 고증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이 책의 원서는 이미 1978년 산세이도에서 나온 뒤 30년 만에 고단샤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다. 당시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이 만주국의 사회 ․ 경제 기반을 닦아주어 동북(만주)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등 일본 내에는 여전히 아시아 침략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보수파의 시각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역사의 과오를 스스로 밝히고, 인정하는 세력들도 존재한 것이다. 저자인 오카베 마키오 씨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과거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기구 가운데 어떠한 선의의 개인도, 객관적으로 보면 타 민족에의 침략과 억압의 역사적 책임을 어쩔 수 없이 분담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쓸데없이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과 일본인이 해온 현실의 역사적 역할을 응시하여, 파시즘의 재기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막는 것이다.”
1910년대 이후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였고,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또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문제나 ‘동북공정’ 문제는 현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만주를 조명하는 것은 곧 독도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 과거 식민지 국가의 상흔을 지우지 못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를 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역사가가 이른 시기에 낸, 초보적이면서 실증에 근거한 통사”
오카베 마키오 씨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제국주의 파시즘의 식민지 지배를 규탄, 또는 변호하는 연역적인 논리를 피해, 역사의 사실 과정을 분명히 한 위에 역사상을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귀납적 방법을 취했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 당시의 한정된 사료 상황 가운데 가능한 한 실증을 명시했다.
귀납적 논리에 입각한 틀로 짜인 글을 읽다보면, 만주국을 일본의 전쟁물자, 식량공급선, 지하자원 등을 제공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들이 동시에 만주국을 자멸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5개년계획의 실패로, 태평양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1942년 임시자금통제법 개정, 중요산업통제법 폐지와 이것에 대신하는 산업통제법 제정 등은 어느 것이나 통제 범위와 방법을 한꺼번에 강화하는 것이었다. 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본문 97쪽)
이 책의 구성과 특징
이 책은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지닌 일본인의 관점에서 만주국의 실태와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먼저Ⅰ장에서는 만주사변의 역사적 의미를 포함해, 세계사의 현실과 관련시키면서, 만주국 의 설립과 육성의 정치 과정을 좇는다.
먼저 이 장에서는 일본 관동군이 근대전 총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 경제적 기반을 어떻게 닦아나가는지 상술한다. 가지 않은 불모의 땅을 개척한 것인 만큼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을 처음부터 성공리에 진행시킨 것은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이 동북(만주)을 일본 경제권에 흡수시켜 군수산업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동북에 진출하는 일본의 민간 자본의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그 이윤배분에도 강한 통제를 가한다. 군수산업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경제 체제보다는 군의 완벽한 통제에 따른 균형적인 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안한 치안상황과 이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때문에 민간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게 된다. 관동군은 만주국의 중앙국가기관이나 다름없었던 만철을 분해해 업종별 독립 특수 회사로 만든 뒤 군의 직접적인 통제를 가한다. 또한 만주국을 구성하는 4성에 대한 치안정책, 일반행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분해하기 시작한다. 구 군벌의 지반으로 전통적인 독립성을 조금 유지하고 있던 4성을 14성으로 쪼갬으로써 군부에 대한 중앙집권화와 치안, 경제 통제를 원활하게 진행한 것이다.
이어서 Ⅱ장에서는 일본 파시즘이 만주국에 가장 기대한 점, 즉 총력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산업개발과, 소련에 대한 반혁명적인 전쟁준비를 축으로, 만주국의 지배 실태와 모순을 분석한다.
이 장에서는 전쟁준비를 위한 5개년계획에 따른 본격적인 산업개발이 어떻게 이뤄지고, 5개년계획과 북변진흥계획 등의 내부 모순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5개년계획의 목적은 대소전 준비의 경제적 기초를 위해 “유사시 필요한 자원의 현지개발에 중점을 두고,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국내의 자급자족과 일본의 부족자원 공급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광공 · 농축산 · 교통통신 · 이민의 각 부문에 걸치며, 특히 철광․석탄 부문에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각 부문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문제들이 맞물려 5계년계획과 북변진흥계획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만주국에 대한 일본투자가 한계에 달하고, 외자도입의 길이 막히자, 정부는 당장 국민저축운동을 시행한다. 하지만 심각한 인플레가 일어나, 물가가 폭등하고, 이것은 민중의 생활을 파괴해 결국 5계년계획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또 제철업의 경우, 만주국은 일본에 제강원료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일본산 강재를 소비하는 비합리적 일면을 보인다. 5개년계획은 생산력 확충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잃고, 제한된 설비로 최대의 증산을 강행하는 것으로만 전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무동원의 강화, 노동조건의 저하를 가져오고, 민중에의 직접 착취를 증대시켰다. 결국 반만 항일 감정을 더욱 자극시켜, 반만 항일운동에 가담하는 민중들이 점차 늘어나며 만주국의 괴멸을 가져왔다.
마지막 Ⅲ장에서는 동북 지방은 본래 농업지역이고,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농업정책의 실태를 파악하여, 식민지 지배와 민중의 관계를 밝혀 그 모순을 그린다.
<본문 중 발췌>
25, 26쪽
제1차 대전 시기에 일본의 동북경영은 크게 진전되었다. 농업 발전과 탄광 확장으로 만철의 수송량은 현저하게 늘어나, 대두의 국제상품화, 만철의 배양선培養線 개통, 러시아혁명의 전란에 따른 중동철도의 수송력 저하 등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안산鞍山에 철광산을 획득한 만철은 일본의 중공업 발흥에 맞추어 제철사업에도 나섰다.
금융면에서는 일찍부터 지반을 굳혀 요코하마쇼킨橫浜正金은행에 가담하여 조선은행과 동양척식 등의 반半국가적인 일본자본이 동북에 진출했다. 미쓰이三井, 오쿠라大倉 등의 재벌을 선두로 민간자본이 동북으로 유입되는 것도 성행했다. 동북에 있는 일본의 민간회사는 1911년에 30사, 불입자본금은 약 1억 1,200만 엔이었다. 10년 후인 1921년에는 797사, 약 5억 1,700만 엔을 셀 수 있게 되었다.
167쪽
관동헌병대와 각지의 특무기관은 반만 항일운동을 하거나,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되는 인물 가운데, 사법기관에 “사건을 송치하는 것도, 불기소 내지 단기형의 판결을 받는 것이 예상되는 자”나, “죄상이 가볍다고 해도, 석방이 불가한 자”(고문의 희생자인가?)를 법의 수속을 무시하고 제731부대에 보냈다. 부녀자를 포함한 이들 ‘특이급特移扱’의 사람들은 부대의 감옥에 수용되어, 필요에 응해 각종 생체실험에 이용되었고,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균감염실험, 동상실험, 내압실험 등외에, 말의 혈청을 대량으로 주사하거나, 정맥에 공기를 주입하는 흥미본위의 실험까지 했다. 이들 생체실험의 희생자는 매년 500~600명을 내려가지 않았고, 1940~1945년에 제731부대 본부만으로 3,000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