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거울 6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자 수필가 정명희의 산문집. 활자를 좋아해 동료들의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몸이나 마음이 아픈 환자들과 함께한 나날들의 이야기, 이웃들의 이야기, 세 아이를 키우며 가슴 아프거나 뿌듯한 사연을 글로 써 모았다.
의사에게 환자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는 처방과 진단을 내리는 입장과 받는 입장으로, 일방적이라고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어디 일방적이기만 한 관계가 있겠는가. 의사와 환자가 마주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행위는 양방향이라 할 수 있다. 정명희 의사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서 더 나아가 환자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 말한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대구의료원에서 일한 지 33년, 환자들과 함께하며 느낀 순간순간의 기쁨은 저자에게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병원에 방문한다. 때로는 청소년기의 방황, 자라지 않는 키, 너무 이른 성숙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돌보는 이의 마음을 수월하게 해주려 아픔을 참고 해맑게 웃는 아이가 접어준 붉은 카네이션은 마음을 울리고, 이를 뽑고는 월동 준비를 했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아이의 모습은 웃음을 부른다. 저자는 아이들을 동백에 비유한다. 추위를 견뎌 눈 속에서도 능히 꽃을 피우는 동백처럼 믿고 기다려주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 아이들이라고.
돌짜리 어린 동생의 병실을 지키는 언니는 자신의 건강은 잘 챙기지도 못하다가 몸이 상한다. 주말 야간의 응급실에는 갖가지 사연의 환자들이 찾아와 인생살이의 교훈을 전한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아이가 술에 취해 실려 오자 부모는 두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지켜본다. 그렇게 밤새 거리를 달리다 새벽 출근길에 나선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의 낮 달맞이꽃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하게 된다.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는 인연, 위로, 흔적, 치유 4부로 나누어 동료와 환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담담하게 풀어내 진정성이 느껴진다. 저자는 마음의 힘을 믿고 기꺼이 행동으로 옮긴다. 상대방과 대화하는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기 쉽지만 그 관심을 상대에게 돌려 무슨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고려해 더 넓은 세상을 살아간다. 솔선수범해 자원한 설날 당직 근무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타이어가 찢어진 상황에서도 화내기보다 액땜이려니 하며 견인차 기사와 타이어집 주인과 웃음을 나눈다. 비협조적인 환자 때문에 속이 상한 직원들의 마음도 달래 준다. 그렇게 타인을 돕는 일은 다시 자신의 행복으로 돌아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긴급 상황 때 코로나 선별진료소의 정신없는 병원 상황도 담겨 있다. 일시에 병동을 비우고 시설을 재정비하고 환풍구를 막아 격리시설을 갖추는 일은 전 직원이 동원되어 땀범벅이 되었다. 우주복처럼 생긴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눈에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를 코가 아프도록 눌러서 끼고서 장갑을 낀 채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진료기록을 입력하고 검사 처방을 내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날짜가 바뀌어 전산시스템에 이름이 뜨지 않아 놀라기도 한다.
의사는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다. 의사 집이 무의촌이라, 오히려 환자의 아픔을 돌보는 일에 몰두해 제 몸 돌보는 데 소홀해지는 경우도 많다. 환자 진료 과정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동기의 부고 문자는 쩌릿한 아픔이 된다. 우리 삶의 마무리에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저자는 나름의 답을 내린다. 수천 번의 생을 반복하여 산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곁에 있는 사람을 항상 사랑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겠다고.
무엇을 사랑하고 안하고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사랑하기로 선택했으면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여 나름의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증명하듯이 저자는 지칠 만한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으로 여긴다. 답답한 방호복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모두가 힘든 상황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아 이 순간을 잘 견뎌내길 소망한다.
우박을 맞아 상처 입은 사과에 ‘보조개 사과’라 이름을 붙이자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생각은 하기 나름, 마음은 먹기 나름, 희망은 품기 나름이다. WC(with corona) 시대, 저자는 사람들과 만나지 못해 어렵더라도 양 볼에 보조개를 지어가며 ‘인생이 별것이야, 까짓 거’ 하는 심정으로 씩씩한 걸음을 내딛자고 말한다. 사랑은 주기 나름이니,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는 저자의 글이 아픈 이들에게 큰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