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지위 향상이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의지와 용기가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에서 투사로 넘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 100인’은 길을 열어주었고, 본보기가 되었다. 이들은 우리에게 대담해지라고, 변화하라고, 의식을 깨어나게 하라고 엄중하게 요구한다. 사고방식과 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최초의 여성’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 100인은 수호신으로서, 성찰과 확신과 용기의 힘으로 낡아빠진 도덕적 질서를 뒤엎으라고 상기시키고 있다. 최초는 또 다른 최초를 낳으리라. 욕망은 욕망을 부르고, 필요한 용기는 욕망과 함께 나타나리라. --- p.9
훌륭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반대를 일삼으며 선덕여왕을 악의적인 시선으로 봤다. 상대등이던 비담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선전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유신이 기지를 발휘하여 선덕여왕에게 불붙은 연을 하늘에 띄우게 했다. 그러고는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하늘에 올라가 빛나고 있다는 말을 저잣거리에 퍼뜨리게 하여,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독려하고 반군을 진압했다. --- p.40
에밀리는 어릴 적부터 편견에서 자유로웠다. 1706년 브르테유 남작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여성에게 교육을 허락하지 않은 시대였지만, 열린 사고를 가졌던 브르테유 남작은 에밀리에게 아들과 동등한 교육을 시켰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독일어를 배웠고, 예술 분야와 승마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 p.86
플로라는 이혼할 권리, 자유롭게 사랑할 권리,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며 샤를 푸리에와도 교류했다. 하지만 당시 등장한 산업사회에 대한 푸리에의 비판은 지지하면서도 사회주의적 공동 생활체를 만들자는 유토피아적 이론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과 노동자들의 운명을 연결한 최초의 사회주의 운동가로, 서로 단합하여 보편적인 노동자 연합을 만들자고 촉구했다. 남성 근로자의 운명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면, 여성 근로자는 훨씬 더 악조건이다. ‘가장 억압받는 남성도 아내라는 존재를 억압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아내는 프롤레타리아 중의 프롤레타리아다’. --- p.100
하지만 어떤 유대교회당에서도 여성 랍비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나치의 박해로 많은 종교 지도자가 이주하거나 사라졌기 때문에 레지나는 랍비가 필요한 공동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베를린의 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성무일도를 집행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기간은 짧았다.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하던 레지나는 1942년 11월 6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에서도 레지나는 수용자들을 돕고 지원했다. --- p.224
1939년, 이레나는 게토에서 아이들을 몰래 빼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벽에 낸 구멍이나 중환자 후송 차량 또는 쓰레기차에 실어서 아이들을 빼냈다. 그녀는 탈출시킨 아이들을 위해 가짜 출생증명서를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조직망을 통해 아이들을 받아주기로 약속한 안전한 시설이나 가정으로 극비리에 보냈다. --- p.227~228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로자는 버스에 올랐다. 퇴근하는 길이었다. 2857번 버스 기사는 그녀에게 백인 남자가 앉을 수 있도록 좌석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로자의 대답은 짤막했다. “싫어요.” 로자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내가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거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육체적으로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평소에 퇴근할 때보다 더 피곤한 건 아니었다. 마흔두 살이니 나는 늙은이가 아니다. 내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차별을 참는 것이 지긋지긋해서였다.’ --- p.254
만 11세이던 2009년부터 말랄라는 영국 BBC 방송 사이트의 블로그에 파슈툰족의 ‘굴 마카이’라는 가명으로 탈레반에 점령당한 일상과 여성의 교육을 금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 블로그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2009년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말랄라는 2011년 아동 인권 기구의 국제 어린이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같은 해, 파키스탄 총리는 말랄라에게 국가 청소년 평화상을 수여했다.
--- p.332